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순천 왜성(倭城)

메탈 2009. 4. 16. 15:47

지정번호 : 시도기념물 171호
지정년월일 : 1999.02.26
시 대 : 조선시대
규모/양식 : 일원(188,428㎡)
소유자 : 미상
소재지 : 전남 순천시 해룡면


순천 왜성은 왜교(倭橋) 또는 예교(曳橋) •왜성대(倭城臺) 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 광해군때 이수광이 순천부사로 있을 당시에는 그 이름이 좋지 않다 하여 망해대(望海臺)란 새로운 명칭을 지어 부른 예도 있었지만, 일본측의 기록에는 주로 순천성(順天城)으로 나타나 있으며 1997년 1월 1일 국가사적 제 49호에서 해체되기 전까지는 ‘승주 신성리성 ’으로 불려왔다.

 

이 성은 견고한 중성(重城)으로서 정유재란 때(1597년 9월∼11월말경) 소서행장군(小西行長軍)이 쌓아 약 1년 이상 일본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일본군이 호남공략을 위한 전진기지 겸 그들 최후의 방어기지로 삼기 위한 목적에서 축성되었다.

순천 왜성에서 정유재란의 마지막 단계인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약 2개월간에 걸쳐 펼쳐진 전투가 바로 왜교성전투로서 이 전투는 광양만 해역과 해룡 일대의 육해상에서 조선과 명측의 수륙연합군과 소서행장 휘하의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정유재란 최대의 결전이었고 11월 19일에 있는 노량해전을 끝으로 임진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순천 왜성은 거주주체에 따라 군사적으로 방어 목적을 지닌 왜성(倭城)이고, 지형에 따라 구릉에 가까운 낮은 산마루(山頂)에 있는 산정식산성, 지리적 위치에 따라 해안성(海岸城), 축성재료에 따라 석성(石城), 중복도에 따라 복곽성(複郭城), 폐합여부에 따라 폐합성(閉合城)으로 구분된다.

성벽은 외성(外城) 3첩과 내성(內城) 3첩으로 축성하였는데 내성만이 그 흔적이 분명하고 외성은 분명치 않다. 외성이란 해자(垓子) 밖에 있는 낮은 산의 외곽을 돌아가고 있는 성을 의미하고 내성은 유구가 뚜렷한 석성이다.

 

왜성은 1938년 조선 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1934년 제정)에 의거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어 오다가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국가사적 제 49호(지정 명칭 : 승주 신성리성)로 승계되어 왔다(면적 : 내성 외성을 포함 총 97,096평).

1996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일제 강점기에 지정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실시한 뒤에 신성리성(국가지정 당시 명칭)을 1997년 1월 1일에 국가사적에서 해제하였고, 사적에서 해제하면서 이 성을 왜성임을 명기토록 하면서 도지정문화재 지정권고를 하였다(도에서 지방문화재 지정신청토록 순천시에 시달).

순천시에서는 1997년 3월 4일에 왜성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하면서 지정면적을 내성으로만 한정하여 총 37,858평(125,143㎡)만 신청하였고, 유적의 실재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주민들의 민원과 주변의 공단건설 등으로 인해 축소 신청하였다.

 

1997년 6월 문화재위원회 심의결과 원래 지정구역이었으나 제외된 외성지역의 유구확인조사를 거치도록 하여 문화재관리국에서 허가를 받아 순천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조사구간의 유적은 훼손이 심하나 주변에서는 일부 유구를 확인했다.

본성은 그간 사적 제 49호로 승주 신성리성으로 불려왔으며 일제에 의해 문화재적 가치가 잘못 인식되거나 왜곡되어 1996년 국가문화재의 재평가시에 중앙문화재위원회의 조사심의 결과 국가문화재에서 해제되고 문화재관리국에서는 도지정문화재로 지정하도록 권고한바 있으며, 그동안 국가사적이었고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고 보존상태 등으로 보아 순천왜성으로하여 도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지정구역은 순천시에서 신청한 내성(석성)과 입구의 해자 •왜교 부분까지 확대 지정하고 외성 부분은 개발시에는 관할 자치단체(순천시)로 하여금 반드시 학술조사 •발굴조사 등을 실시하여 유적의 내용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기도록 하였다.-문화재청

 

도로에서 왜성의 천수각이 보인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니 맨처음 보이는것이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이다.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

정왜기공도권은 순천왜성전투,노량해전,남해도 소탕작전 등으로 구성된 두루마리 그림이다.  명나라 황실의 종군화가 그림답게 묘사가 세밀하고 역동적이며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소장자가 사진만 뿌려놓고 잠수해서 많은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11장의 사진 자료는 콜럼비아 대학의 게리레드야드 교수를 통해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그동안 임진왜란을 그린 전투도 중에는 「평양성전투도」가 전해지고 있었지만 , 전쟁이 끝난 200년후의 작품으로 화가가 전투를 목격하고 그린 것은 아니고, 당시의 기록을 참고해 상상력을 덧붙여 그린 작품이다. 일본측에서 남긴 그림들도 대부분 그러했다.  그러나 최근 입수한 6.5미터의 「정왜기공도권」은 「평양성전투도」와는 전혀 다르고, 병사의 동작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종군 화가가 전지에서 상황을 보면서 그린 일종의 종군화이므로 그 내용이 세밀하다. 「정왜기공도권」을 정확하게 복원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이 두루마리는 400년전의 사건을 어떤 역사서적보다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순천왜성 조감도

 

스카이뷰

현재는 천수각부근과 문지 1, 2만 남아있다 

 

정왜기공도권에 있는 그대로 해자와 문이보인다.

 

 

문지 1 이다. 

 

원래 성곽이 문 옆으로 연결되어있는데, 모두 없어지고 문쪽의 성곽만 복원한 것이다.

 

 

 

 

 

문에 올라보았다.

 

문지 2 와 천수각이다. 

 

문지 2.

 

 

 

문지 2 에서 바라본 문지 1.

 

왜성에 도착이다.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한국적 곡선은 보이지 않는다.

 

좌측에는 옛모습이 조금 남아있었다.

 

 

문 안에서 바라본 모습.

 

배수로.

 

일본성의 특징인 직선적 성곽. 천수각이 보인다.

 

 

천수각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들어가 본다.

 

 

앞에 또하나의 문이있다.

 

 

천수각이다.

 

 

 

 

 

일본성의 구조를 알기쉽게 보면... 

 

첨수단 맨위다. 건물이 들어서있던 자리다.

 

정왜기공도권에 그려져있는 천수단모습.  

 

위에서 바라본 모습.

 

 

다시 다른 문으로 나간다.

 

 

각이 진 일본성이다.

 

 

 

천수단을 끼고 돈다. 일본성은 곡선이 전혀없다.

 

 

 

 

아까 들어갔던 문.

 

 

문지 2 로 나왔다.

 

유채꽃길을 걸으며 답사를 마친다.

 

울산에서 순천까지 일본의 왜성은 총 30개인데, 이중 전라도 순천에 1개를 제외하면 전부 경상도에 있다. 

그중 울산의 서생포왜성 상태가 가장 좋다고하며, 일본에서도 관광객이 많이 간다고 하는데, 순천왜성도 비록 일부지만 잘 복원해 놓았다.

 

왜성이라고 무시할필요없다. 이거 쌓은거 전부 우리민족이고 우리선조였으니 말이다.

임진왜란때 관군이 일찍 도망가버리고말자, 일본은 우리백성 잡아다가 이처럼 부려먹었다. 이 왜성또한  우리의 산 역사이자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