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대구읍성남문 영남제일관 (嶺南第一關)

메탈 2009. 4. 20. 16:47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대구읍성은 선조 24년 부사 윤현이 선산 군위 안동 읍민을 징집하여 대구부민과 더불어 토성으로 축조하였으며 임진왜란에 붕괴되어 오랫동안 복원되지 않고 있다가 영조12년(1736)에 석성으로 축성되었다.

대구읍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 문이 있었는데 약전골목 길 남성로에 정문인 남문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동성로의 동문 진동문(鎭東門), 북성로에 북문 공북문(拱北門), 서성로에 서문 달서문(達西門)을 냈다. 따라서 지금의 대구중심 거리는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사대문으로 향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구읍성은 민족정기 말살과, 성밖 상권을 장악한 일본 상인들이 성안의 조선인 상권을 빼앗기 위한 계략으로 경상도관찰사 서리 친일파 박중양에 의하여 1906년 철거되었다.


영남제일관 앞에 위치한 영영축성비는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쌓은 뒤, 규모와 공사과정을 기록하여 1737년(영조 13)에 세운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공사기간은 1736년 1월에 시작하여 6개월 정도 걸렸으며, 동원된 인원은 7만 8천 534명에 이른다고 한다. 둘레는 총 2천124보(步) 성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에게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한 여장은 819첩, 높이는 서남 18척, 남북 17척, 뒤 축대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級)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읍성의 네 모퉁이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와 한양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망경루라는 4개 망루가 있었다. 원래 남문 밖에 세웠는데 198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현재의 영남제일관은 1980년에 그 자리를 옮겨 새로 세웠으나 성루(城樓)의 위치·규모·품격 면에서 원형과 동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서울의 4대문과 유사하게 대구에도 역시 4대문이 있었는데,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성문도 철거 되었다가 1980년 그 중 남문을 망우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중건 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영남제일관이다.

 

 

입구가 뒤쪽이다. 즉 안쪽이 되겠다.

 

 

여기가 바깥쪽.

 

 

 

 

 

야경.

 

 

 

 

 

 

 

아카바님과...

 

대구읍성은 현재 남문만이 복원되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