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택지돈대(宅只墩臺)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 (강화군)
명 칭 : 택지돈대(宅只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1기
지 정 일 : 1995.11.14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954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재무부)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가천의과대학 앞으로 난 348번 지방도를 따라 장흥리 방향으로 약 1.1km를 가면 우측에 해안쪽으로 돌출한 저평한 지형에 위치한다. 현재의 돈대는 1998년 복원정비된 것으로 동서 32m, 남북 32m의 방형돈대이다. 벽체의 두께는 3m이고, 북쪽으로 2좌의 포좌와 동서 각각의 1좌의 포좌가 마련되었다. 53돈대 중 유일하게 여장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기할만한 사항은 지정 당시 택지돈대로 알려져 유형문화재 제33호 택지돈대로 지정되었으나 원래의 명칭이 ‘後崖墩臺’라는 설이 있으므로 검토가 요구된다.
이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 어영군 2천명과 경기·충청·전라 등 3도 승군 8천명을 동원하여 축조한 돈대중 하나이다. 화강암을 정방형으로 쌓아 축조하였으며 4개의 포좌가 설치되어 있는데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돈대 인근 마을에는 이 돈대를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돈대 전면부.
안으로 들어선다.
입구.
남아있는 원래의 여장모습이다.
포구위에서 바라본 방향.
여장 아래에 현재의 무기인 박격포다.
14.덕진돈대 (德津墩臺)
소재지 : 불은면 덕성리 373
德津眞에서 포장된 길을 따라 남쪽으로 약 200여m를 가면 남장포대를 지나 해안쪽으로 돌출한 육축부가 있는데, 돈대는 이 돌출한 지역의 상단에 위치한다. 동쪽에 2좌, 남․북에 각각 동쪽으로 치우쳐 1좌씩 포문을 설치하였고, 현재는 정비되어 그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서쪽 중앙에 출입구 시설을 두었으며, 돈대의 벽체는 들여쌓기를 하였다. 현재의 德津墩臺는 1977년 복원된 것으로 평면은 장방형으로 동쪽이 약간 좁은 편이다.
덕진돈은 1977년 복원되어 현재 장방형으로서 포좌 4좌를 갖추고 있다.
덕진진의 남장포대위로 덕진돈대가 보인다.
옆으로 돌아가본다.
전방 포구.
덕진진의 경고비다.
1876년, 흥선 대원군의 명으로 세웠으며 높이는 147cm, 폭은 54.5cm, 두께는 28cm이다. 비석 정면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문장이 음각되어 있는데,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뜻으로 결연한 쇄국의지를 담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가본다.
15.광성돈대 (廣城墩臺)
소재지 : 불은면 덕성리 23-1
廣城墩臺는 광성보의 문지와 연결되어 북서쪽에 있는 돈대이다. 현재의 돈대는 1976년에 복원된 것으로, 포좌 4좌를 갖추고 있다. 돈대의 규모는 동서 35m, 남북 43m 정도이다.
광성보 문루와 연결되어있다.
16.손돌목 돈대 (孫乭─墩臺)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는데, 강화도의 다른 돈대들이 사각 모양인 것과는 달리 원 모양으로 만들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외국 함대들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파괴되었던 성벽을 복원하였다. 돈대 입구에는 서해안 지역의 북한계선 식물인 탱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손돌목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돈대의 형태는 정원(正圓)에 가깝다.
17.용두돈대 (龍頭墩臺)
소재지 : 불은면 덕성리 산124
사적 제 227호 광성보 내에 위치하는 것으로, 광성보 입구에서 남쪽으로 약 40m 떨어져 있는 육지에서 돌출한 암반위에 지어진 돈대이다. 돈대의 평면형태는 부채꼴상의 不定形으로 그 규모는 동서 29m, 남북 11m, 둘레 66m, 석벽의 높이는 2.4-2.6m이다. 외성과 연결되는 98m에 이르는 통로를 만들고 강화도의 돈대중 바다쪽으로 가장 돌출된 지형에 만들어 졌다. 돈대 중앙에는 故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쓰인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성의 생김새가 마치 용의 머리와 같다 해서 용두돈대라 했다. 좁은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밀고 있는 암반을 이용해 설치한 천연의 교두보인 것이다. 물이 빠지고 나면 건너뛰어도 될 듯한 좁은 강폭이 절묘한 지형을 이루며 서울을 지척해 두고 있다. 이곳 역시 병인·신미양요 때 프랑스군·미군과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던 현장이다. 고려 때부터 천연의 요새였던 이곳은 조선 숙종5년에 축조되었다.
용두돈대는 보수공사중이라 들어갈수가 없었다. 대신 성곽의 속모습을 볼수있어 다행이었다.
지난번 답사때의 사진으로 대체한다.
해안으로 한참 나와있는 돈대다.
덕포진의 포대가 바로 앞이다.
18.오두돈대 (鰲頭墩臺)
소재지 : 불은면 오두리 5대
華島墩臺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1㎞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 바다로 돌출한 육지의 첨단부 정상에 鰲頭墩臺가 위치한다. 오두돈대는 동쪽으로 바다와 마주하고 있고, 그 내부는 평탄하지만 동쪽과 남쪽은 경사가 급하다. 현재는 보수․정비되어 복원된 상태이며, 주변에는 자기와 기와편등이 수습된다. 돈대의 동남쪽 오솔길 아래에 오두정지와 강화전성이 위치한다.
오두돈은 불은면 화도독 해변 뫼뿌리에 있으며 남쪽에는 광성돈에 있다. 그 내부는 평탄하며 전면은 단애로 형성되어 있다. 문지 좌우 및 석벽 일부가 붕괴되어 있으나 대체로 양호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복원 중이다.
이 돈대에서는 미석도 확인된다. 이 돈대는 강화 외성광의 연결 흔적이 남아 있으며 포좌의 위치가 외성보다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외성이 돈대의 포좌 위치보다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오두돈에서 가리산돈대까지 5돈대는 현재 강화군청에서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강화의 거의모든 돈대가 이처럼 위장되어있다.
아랫부분만 옛날모습인것 같다.
하지만 앞쪽은 거의 원래모습이다.
옆쪽은 반반.
안쪽수구.
바깥쪽.
정원(正圓)에 가까운 돈대.
19.화도돈대(花島墩臺)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7호 (강화군)
명 칭 : 화도돈대(花島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99.03.29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선원면 연리 54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강화군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선원면에서 강화읍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오두돈대에서 약 1.1㎞정도 더 가다보면 우측으로 해안쪽으로 돌출된 야산이 있다. 유적은 이 야산의 평탄지에 조성되어 있다. 花島墩臺는 강화 53돈대중의 하나로 중영우부좌사의 후방돈대와 남쪽의 오두돈대와의 사이에 위치한 돈대로서 동서 32m, 남북 32m 규모의 방형돈대이다. 최근까지 석축이 잘 남아 있었지만 근래에 들어 훼손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바다와 접한 동쪽은 인공시설물에 의해 훼손된 상태이고, 내부는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남쪽에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 등 현상변경이 심한 상태이다. 포좌와 출입구의 위치는 추정이 불가능하다.
화도돈 주위로 외성이 축조되어 있다.화도돈은 내부 과수원으로 사용되어 있어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돈대 주위로 외성이 축조되어 있다. 이 돈대는 석벽터를 기준으로 볼 때 방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서쪽에는 새로이 쌓은 이질적인 석축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의 돈대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돈대지 남서쪽에 화도 수문 개축비가 있다. 과거에는 이 수문을 통하여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성곽은 거의 없는 상태다.
좌 우측으로 성곽의 뿌리는 잘 남아있다.
김포쪽 모습.
20.용당돈대(龍堂墩臺)
가리산돈대·좌강돈대와 함께 용진진에 속해있으며, 근래에 복원되었다.
너무 깔끔하게 복원되어, 마치 테마공원같은 느낌이다.
정면모습.
옆쪽 포구.
안으로 들어가본다.
김포방향으로 3개의 포구가 있다.
21. 좌강돈대 (左岡墩臺)
소재지 : 선원면 신정리
복원된 용진진의 우측에 성벽으로 연결된 돈대이다. 左岡墩臺는 용진 마을의 비교적 낮은 평지상의 독립된 고지에 설치된 돈대이다. 좌강돈대는 용진진의 관할하에 있던 돈대로서 중용우부좌사의 중앙초소였다. 현재 좌강돈대는 돈대면석이 1-2단이 남아있던 것을 최근 복원한 것으로 서쪽으로 출입문이 서쪽으로 출입문이 만들어져 있고, 동쪽으로 4좌의 포문이 배치되어 있다.
좌강돈은 선원면 연리 가리뚝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래에는 용당돈이 있다. 별칭으로는 용진돈대이다.
이 돈대는 한 변이 40m 정도의 정방형이지만 그 모퉁이는 곡선의 형태이다. 이것은 토축에서 생기는 토압을 완화시키기 위한 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수로 측면의 매우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수로를 따라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듯하다.
용진진의 문루, 참경루에서 연결된다.
밖으로 나가본다.
바로앞에 문수산성이 보이고...
22.갑곶돈대(甲串墩臺)
소 재 지 :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20
문 화 재 : 사적 제306호
축 조 : 숙종 5년 (679 년)
강화역사관內 利涉亭을 지나 바다로 돌출한 좁은 육지의 첨단부에 위치한 강화53돈대 중 하나로 현재 면적은 45.339㎡이다. 북쪽으로는 갑곶나루가 위치하고 있어서 강화와 김포의 유일한 통로로 활용되어 왔으나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甲串의 유래는 丙子胡亂때 淸군사가 월곶에 이르러 거센 물길에 강을 건너지 못하자 안타까워하며 탄식한데서 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1976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甲串墩臺의 위치에 대한 이견으로는 현재의 舊강화대고 입구 부근이 갑곶돈대라는 조사의견도 있다.
1232년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이후 1270년까지 몽고와의 줄기찬 항전을 계속하며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강화의 관문으로 적진을 살필 수 있는 진해루가 있었으며 물살 건너편의 문수산성 서쪽 성문인 취예루를 마주하고 있었다.
갑곶돈은 1656년 인천의 제물진에 소속되었다가 숙종 5년에 돈으로 축조되었다. 염주돈·제승돈·망해돈과 8문의 대포를 설치한 갑곶포대가 갑곶돈에 소속되었고 남쪽에 수문이 있었으며 강화외성과 연결되었다.
1866년 9월 식민지의 기치를 뒷전에 숨기도 천주교도를 박해한다는 이유로 강화를 침략, 도굴과 약탈을 일삼았던 병인양요를 맞아 프랑스군 600명과 격렬한 전쟁을 치른 곳도 이곳이다. 프랑스군은 19월 3일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섬멸된다.
갑곶돈의 일부가 1977년 강화의 다른 전적지와 복원되면서 대포와 소포 2문 등을 새로 만들어 설치·전시하고 있는데 그 갑곶돈 자리에 강화역사관이 들어서 있는 것은 퍽 의미 있는 일이다.
이곳엔 강화도에 산재해있는 각종 비석을 모아두었다.
참고
강화도의 53돈대를 다 찾을수는 없겠지만, 어느것이 남아있고, 어느곳이 군부대내에있어 들어갈수 없는지 정도의 정보는 쉽게 얻을수 있어야한다.
물론 돈대의 정학한위치도 함께말이다.
그런 정보가 없어서 돈대찾는데 애를 먹었다.
다행히 자료정리하는중에 다음과같은 도표를 발견하였다.
내가 놓친 돈대는 계룡돈대,굴암돈대 정도인것 같다.
'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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