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돈대는 성벽 위에 석재 또는 전(塼)으로 쌓아올려 망루(望樓)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높직한 누대(樓臺)다.
돈대의 형태는 원형과 방형 2가지가 있으며, 내부에는 2~3단의 마루를 만들고 외부를 향한 벽면에 각 층마다 작은 안혈(眼穴)을 내어 대포·총·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 설치의 기록은 조선시대 문헌에서 나타난다. 〈남한지 南漢志〉에 인조(1623~49 재위) 때 수축된 남한산성에 2기의 돈대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위(金錫胃)의 건의에 따라 강화에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그 명칭과 위치가 그려져 있다. 1796년 완공된 수원 성곽의 서북·남·동북의 3곳에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이를 공심돈(空心墩)이라 불렀으며 수원성(華城)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시설물이다. 현재는 서북 공심돈만이 남아 있다. 이러한 공심돈은 서양 중세 봉건제후 성의 일부인 탑과 유사한데 수원성 성역에 참여했던 정약용이 〈기기도설 奇器圖說〉을 연구한 것으로 미루어 서양 성곽을 본뜬 것으로 짐작된다.
축성연대는 53개 돈대중 49개 돈대는 조선숙종 5년 (1679년) 기미년에 유수 윤이제 재임시 어명에 의한 병조판서 김석주의 지휘를 받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삼도의 승군(僧軍) 8,9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 만에 완축하였으며 빙현돈은 숙종44년 (1718년)에 유수 권성이 축조 하였으며 철북돈은 다음해인 숙종 45년 (1719)에 유수 심현택이 축조 하였고 초루돈은 그 다음에 숙종 46년 (1720)에 유수 어유구가 축조 하였고 작성돈은 영조 (1725)에 유수 박사익이 축조하였다.
그 후 양암돈과 갈곶돈 두 돈대는 너무 오래되어 폐쇄 하였고 51개 돈대만 수호 관리 하였다.
월곶진 : 월곶리 연미정과 황형기념비 근처(옥창돈, 월곶돈, 휴암돈, 적북돈을 관할)
제물진 : 갑곶리 강화역사관이 위치한 일대(갑곶돈, 염주돈, 제승돈, 망해돈을 관할)
용진진 : 연리에 복원됨(용당돈, 좌강돈, 가리산돈을 관할)
덕진진 : 덕성리에 복원됨(덕진돈, 손석항돈, 용두돈을 관할)
초지진 : 초지리에 이미 복원됨(섬암돈, 장자평돈, 초지돈을 관할)
인화보 : 인화리 인화돈의 남동쪽밭과 마을일부(작성돈, 구등곶돈, 광암돈, 인화돈, 무태돈을 관할)
승천보 : 당산리 승천포 부근(낙성돈, 숙룡돈, 소우돈, 빙현돈, 석우돈을 관할)
철곶보 : 철산리 철곶돈 맞은편 철산 교회 부근(천진돈, 철북돈, 의두돈, 불장돈, 초루돈을 관할)
정포보 : 외포리의 '성안이'라고 불리는 곳(석각돈, 삼암돈, 망양돈, 건평돈을 관할)
장곶보 : 장화리 장화감리교회 하단 부근(검암돈, 장곶돈, 북일곶돈, 미곶돈을 관할)
선두보 : 선두리 '진터'로 불리는 정족산성의 서문 아래쪽(후애돈, 동검북돈, 택지돈을 관할)
광성보 : 신현리에 복원됨(광성돈, 오두돈, 화도돈을 관할)
※ 영문(營門) 관할 돈대 : 망월돈, 계룡돈, 굴암돈, 송강돈, 송곶돈, 분오리돈
※ 폐지된 돈대 : 갈곶돈, 양암돈
강화대교를 건너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본다.
1.월곶돈대 (月串墩臺)
강화읍 월곶리 월곶 242
月串鎭址가 위치한 월곶리의 해안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月串墩臺는 한강 진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염하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祖江을 통하여 서해로 진출 할 수 있다. 원래 月串墩臺는 朝鮮 肅宗 5년(1679) 尹以濟가 정비한 돈대이다. 현재 돈대의 평면형태는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규모는 동서 폭 47m, 남북 폭 38m이다. 서쪽의 중앙부에는 홍예문이 있다. 돈대 대부에는 동남쪽에 치우쳐 ‘故功臣將武公黃衛’라 적힌 碑를 찾아 볼 수 있다.
월곶돈은 연미돈으로 불리우기도 하며 규모는 높이 30자, 둘레30m로 둥글고 모지게 쌓았고 장졸로 수직케 하였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남동쪽 석벽이 잘 남아있는 편이며 서남쪽 홍예문과 그 주변의 석벽이 일부 잔존한다. 6개의 포좌가 있었으나 현재 포좌를 확인할 수는 없고 푸고 2구만이 확인되고 있다.
월곶돈은 한강 진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도와 마주하고 있다. 남으로는 염하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조강을 통하여 서해로 진출할 수가 있다. 이 월곶 포구는 서울, 인천, 연백 등지로 교통할 수 있는 요지 중의 요지이다.
2008년까지 48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월곶돈대와 연미정, 월곶진의 발굴.복원공사를 추진하는 한편 주민과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인근 월곶검문소 역시 군부대와의 협의를 거쳐 이전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얼마전가지 이곳은 민간인 통제구역이라 출입할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해제가 되었다.
깨끗이 복원된 월곶돈대다.
돈대안에 강화유일의 정자 연미정이다.
건너편 북한땅.
월곶돈대 위쪽으로는 민통선이라 들어가기가 까다롭다.
돈대 밖으로는 월곶진의 발굴이 진행중이다.
이곳부터는 민통선이라 다른돈대는 군부대때문에 갈수가 없다.
간신히 초루돈대만을 오를수있었다.
2.초루돈대(譙樓墩臺)
양사면 북성리 산47
돈대는 해발 45m의 낮은 구릉상에 축조한 돈대로서, 해안과 가깝기 때문에 해안수비에 유리하다. 평면형태는 남북축이 긴 타원형으로 북쪽으로 3좌의 포좌를 설치하고 남쪽의 출입구를 마련하였다. 출입구 문주석의 왼쪽에는 4행으로 된 축조시기(康熙五十九年四月 日)와 관직명 적힌 銘文이 남아있다. 명문에 의하면 朝鮮 肅宗 46년(1720)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돈대는 해발 45m의 낮은 구릉산에 화강암을 치석하여 계란형 평면으로 쌓았다. 크기는 남북 45m, 동서27m이고 벽체를 따라 북쪽과 북서 북동쪽에 포좌가 있으며 출입문은 남쪽에 있다. 돈대의 바깥 벽면은 한단의 기단석 6~8단 방형 화강을 15cm 가량 들여쌓고 있으며 돈대 상면에 할석을 3단으로 쌓아 흙으로 마무리 했다.
다른 돈대와는 달리 낮은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이 돈대는 남북축이 긴 타원형으로 동쪽과 북쪽의 석벽은 붕괴가 심하다.
포좌는 붕괴, 원형이 훼손되었으나 포구는 3구중 2구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현존 석벽은 7~8단 정도의 높이어서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안으로 들여쌓은 퇴물림 방식을 택하였다. 남벽에는 여장 흔적이 일부 잔존하고 있으며 전돌 사용 흔적도 보인다.
북한땅이 너무도 가깝다.
외벽은 그런대로 양호한 편이다.
3.무태돈대(無殆墩臺)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8호 (강화군)
명 칭 : 무태돈대(無殆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99.03.29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창후리 산151-4외 1필지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강화군외 1인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창후리 선착장에서 북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해안을 따라 직사각형으로 길게 쌓았다.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 방어를 튼튼이 하기 위하여 쌓은 여러 돈대들 중 하나로,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를 해안을 향해 4곳 설치해 두었다.
조선 숙종 5년(1679) 어영군 2천명과 경기·충청·전라 3도 승병 8천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전면부.
입구가있는 뒤쪽. 깨끗이 복원해 놓았다.
입구가 정 중앙이 아니다.
직사각형의 돈대.
4.망월돈대및장성(望月墩臺및長城)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1호 (강화군)
명 칭 : 망월돈대및장성(望月墩臺및長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95.03.01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 2107외 1필지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재무부)외 1인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망월리에 있는 이 돈대는 40∼120㎝의 돌을 직사각형으로 쌓아 올린 것으로, 성곽 위로는 흙벽돌로 낮게 쌓은 담장이 둘러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관리는 관아에서 따로 돈장을 두어 관할하도록 하였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으로 유수 민진원이 어영군을 동원하여 쌓아올렸다.
돈대와 함께 있는 이 장성은 고려 고종이 이곳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해안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쌓아 올린 것으로, 누각을 설치한 출입문이 6곳, 물길이 드나드는 문이 7곳 마련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광해군 10년(1618) 안찰사 심돈이 수리를 하였고, 영조 21년(1745) 강화유수 김시환이 다시 고쳐지었다. ‘만리장성’으로도 불리웠으며, 지금은 홍수를 막거나 물을 저장해 두는 제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돈대는 평지에있으며,직사각형이다.
옆면.
5삼암돈대(三岩墩臺)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35호 (강화군)
명 칭 : 삼암돈대(三岩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99.03.29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223-4외 1필지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강화군외 1인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三巖墩臺는 전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안쪽으로 약간 후퇴한 넓은 대지에 터를 잡고, 후면으로는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있다. 돈대는 평면형태 원형의 돈대로 포좌의 방향은 남서향이며 포좌는 4구이며, 모두 해안을 향해 열려 있다. 축석은 방형의 거친 돌을 그랭이하여 정교하게 짜맞춘 것이다. 횡줄눈은 대체로 일치하지만 종줄눈은 일치하지 않게 쌓아 구조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보인다. 또한 틈틈이 ‘사이돌’을 끼워 안정감을 높였다.
삼암돈은 전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안쪽으로는 약간 후퇴한 넓은 대지에 터를 잡고 후면으로는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있다. 삼암돈은 부분적으로 보수하여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상단에 여장 흔적이 약 4m 가량 보인다.
석벽은 전체적인 지형에 따라 횡줄눈의 높이를 맞추어 쌓았으며 석재 사이에는 그랭이질을 하여 맞닿은 면을 빈틈없이 하려고 하였다. 상부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는 후퇴시킨 퇴물림방식을 사용하였다.
이 돈대는 포좌 4문이 남아 있으며 모두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바다를 향하여 포구가 열려있다. 포좌 내부에는 포탄 등을 보관할 수 있는 이방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포좌 내부는 입구에서 안쪽으로 일정한 폭으로 들어가다가 포구에 근접한 곳에게 급격하게 포좌의 폭을 줄였다.
문으로는 우측 40m 지점에 돌로 만든 누조가 설치되어 있다. 이것은 토축에 스며드는 물을 배수시켜 토압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석누조가 현존하고 있는 돈대는 삼안돈, 건평돈, 굴암돈 뿐이다.
돈대 안쪽모습으로 입구쪽에서 바라보았다.
6망양돈대(望洋墩臺)
종 목 : 시도기념물 제37호 (강화군)
명 칭 : 망양돈대(望洋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99.03.29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재무부)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망양돈대는 남쪽으로 건평돈대까지 3,200m, 서쪽의 삼암돈대까지 1,30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포보의 관리하에 있었다. 높이 3m, 폭 2.5m, 둘레 120m의 원형돈대로 포좌(대포를 설치하는 곳) 4곳, 치첩 40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아놓은 것으로, 경상도군위어영군사 4,300여명과 함경도·황해도·강원도 승군 등 모두 8,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문 안쪽에서 본모습.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포대안에 별도의 저장공간이있다.
포구방향.
입구방향.
돈대밖은 해변이다.
해변에서 바라본 돈대.
7.건평돈대(乾坪墩臺)
종 목 : 시도기념물 제38호 (강화군)
명 칭 : 건평돈대(乾坪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99.03.29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산39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산림청)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건평돈대는 祖先 肅宗 5년 강화유수 尹以濟가 축조한 것으로, 굴암돈대 북쪽 1,440보에 위치하며, 주위가 88보, 雉堞이 40개이고 정포보에 배속되어 있다.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전면에 곡을 두어 배부르게 쌓았다. 현재 내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서남쪽의 포좌부분이 붕괴된 상태이지만, 전체적으로 돈대가 잘 남아있는 편이다. 그러나 석축은 토압에 의해 점점 붕괴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한 상태이다.
견평돈은 선박 출입이 불가능하다. 해안선이 돌출된 곳에 위치하여 바다쪽으로 시애가 잘 확보되고 있다. 돈대 전면은 거의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 지형이고 후면은 바위가 많다.
이 돈대는 문지 및 그 좌우 석벽이 붕괴되었으나 전체적으로 현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이 돈대는 기본적으로 방형이지만 서북쪽의 전면 석축이 약간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직선 선축보다 외압에 잘 견딜 수 있는 구조적인 안정성을 고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벽 측면에 토축에 스며드는 물을 배수시키기 위한 누조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문지 근처에는 여장 판석 흔적이 남아 있다. 포좌는 전면 2좌, 좌우 측면 각 1좌 등 모두 4좌가 설치되어 있다. 이것을 지형을 고려하여 방어와 감시에 유리한 충분한 시야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좌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폭을 줄였으며 내부에는 포탄등의 수납공간인 이방이 없다.
이 돈대는 배부름 현상 토압을 이기지 못해 석벽 면석이 배열이 흩어질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게 찾은 돈대다. 찾는데만 거의 반나절을 허비했다. 간신히 근처 노인네를 한분만나 힘들게 수풀헤치고 올랐던 돈대이다.
입구쪽은 거의 허물어져있다.
돈대 안쪽으로 포구도 많이 무너져 내렸다.
직사각형 돈대.
포구 윗부분.
포구방향에서 바라본 모습.
8.선수돈대(船首墩臺)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0호 (강화군)
명 칭 : 선수돈대(船首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1기
지 정 일 : 1995.03.01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내리 1831외 1필지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문화재청)외 1인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朝鮮 肅宗 5년(1676) 尹以濟가 축조한 돈대로, 장곶돈대 서쪽 1,260보에 위치하고 있고 주위가 33보이며, 장곶보에서 관할하였다고 한다. 동서방향은 북쪽으로 치우쳐 각각 1좌의 포대를 두었다. 출입구시설은 남쪽면 중앙에 두었다.
조선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가 함락(陷落)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조정(朝廷)에서는 강화도를 경강(京江) 어귀의 요새(要塞)로 만들기 위해 숙종(肅宗) 5년(1679) 당시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에게 강화도의 요소마다 돈대를 설치하고, 화력(火力)을 보강(補强)하여 해안경비(海岸警備)를 강화(强化)하도록 하였다.
이 돈대는 당조 병조판서 김석주(兵曹判書 金錫胄)로 하여금 감독(監督)케 하여 축조한 49돈대 중 하나로 일명 송강돈대(一名 宋岡墩臺)라고도 하는데 일부는 둥글게 일부는 모나게 쌓아 반월형 평면(半月形 平面)을 이루고 있다. 이 돈대의 남쪽으로는 검암돈대(黔巖墩臺)가 있고 북쪽으로는 굴암돈대(屈巖墩臺)가 있는데 선수돈대와 굴암돈대는 영문(營門)에서 직접 관할하던 돈대이다.
다른돈대와는 달리 선수돈대옆에는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있었다.
9.장곶돈대(長串墩臺)
종 목 : 시도기념물 제19호 (강화군)
명 칭 : 장곶돈대(長串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1기
지 정 일 : 1995.03.01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113외 2필지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재정경제부)외 2인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장곶돈대는 화도면의 내리와 장화리의 경계가 되는 상봉의 서쪽 능선이 이어져 바다로 돌출한 완사면 능선 위에 위치하고 있다. 348번지 지방도는 장곶돈대가 있는 장곶 위로 지나는데 그 고개 서쪽에 장곶으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가 연결되어 있고 약 200m 정도 이동하면 장곶돈대가 위치한다. 돈대의 평면형태는 원형이며, 북서쪽에서 남동쪽에 걸쳐 4개의 포좌를 두었고, 북동쪽으로 출입구 시설을 두었다. 돈대의 지름은 약 39m이고, 평균 높이는 약 2m이다. 사방의 주위지형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며, 그 정상에 돈대를 두었다. 1993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장곶돈은 매우 돌출된 지형에 설치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뻘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고 산을 등지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은 관측과 방어에 매우 유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석축은 8~10단 놀이로서 내부 지름 31m의 원형이다. 포좌는 전면의 바다를 향하여 4문이 설치되어 있다. 포혈 하단에 반원형 홈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변에는 조개무지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10.북일곶돈대(北一串墩臺)
종 목 : 시도기념물 제41호 (강화군)
명 칭 : 북일곶돈대(北一串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99.03.29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산36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산림청)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여차1리 마을회관에서 장화리 방향으로 348번지 지방도로를 따라 약 300m를 가면 좌측으로 도로가 나온다. 북일곶돈대는 이 도로를 따라 다시 500m 정도 서쪽으로 이동하면 마니산 줄기가 연결되어 서쪽 해안에 곶을 이룬 지형인 대섬이라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돈대는 평면 장방향으로 바다와 접한 서쪽과 남북쪽의 지형은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다. 동서 길이 32m, 남북길이 28m이며, 동쪽면의 중간에 출입문 시설을 두었다. 서쪽에 2좌, 남북에 각각 1좌, 총 4좌의 포문을 두었다. 비교적 잘 다듬은 돌로 바른층쌓기한 육축부가 온전히 남아 있다.
이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유수로 재임할 때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축조한 돈대이다.
이 돈대를 축조하기 위하여 함경도, 황해도, 강화도 3도의 승군 8,000명과 경상도군위어영군사 4,300여명이 동원되어 40일만에 축조하였다 한다. 성곽상부에는 벽돌로 여장을 돌린 흔적이 보이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이 돈대의 규모는 높이 2.5m, 둘레 120m이며 장방형 돈대로서 포좌 4문, 치첩 32개소를 두었으며 장곶소관하에 있었다.
이 돈대도 찾는데 애를 먹었다. 근처에 경비삼엄한 군부대뿐이어서 누구에게 물어볼수도 없고, 마냥 산속을걷다가 발견한 돈대다.
안쪽에서 바라본 입구.
포구위에서 바라본 전방모습.
직사각형 돈대다.
다시 오던길로 마냥 걷는다.
11.미루지돈대(彌樓只墩臺)
종 목 : 시도기념물 제40호 (강화군)
명 칭 : 미루지돈대(彌樓只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99.03.29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여차리 170-2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재무부)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미루지 돈대는 ‘미곶돈대’라고도 불리며, 평면형태는 원형으로 높이 약 2.2m, 동서․남북 지름은 37.5m이고 벽체의 두께는 4m이다. 북쪽의 중심에 紅霓로된 출입구 시설을마련하였고, 남쪽면에 걸쳐 4좌의 포좌를 두었다. 돈대 내부의 동쪽으로 동서 5.7m, 남북 10m정도의 토단이 마련되어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쪽으로 길이 6.5m 정도의 당시 여장이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미곶돈은 화도면 여차리 돌출부 해안선에 있으며 별칭으로는 미루돈대, 미루지돈대이다. 양쪽으로 만곡된 갯벌이 펼쳐지며 해안선이 매우 돌출되어 있는 끝부분의 산봉우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은 다른 돈대가 산봉우리를 뒤에 두고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된다고 할 수 있다.
미곶돈은 석벽 내부가 높은 편이며 동쪽에 6.5m 길이의 여장이 잔존하고 있다. 이러한 여장이 발견되는 것은 미곶돈과 복원된 후애돈 뿐이다.
출입문에는 별도의 돌을 사용하여 문둔데 홈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문둔데홈은 출입문 상단 개석에 만든다. 미곶돈은 일부 붕괴되기는 했어도 대체로 현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홍예문이다.
내부는 많이 훼손된 상태다.
그래도 포구는 잘 있다.
12.분오리돈대(分五里墩臺)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36호 (강화군)
명 칭 : 분오리돈대(分五里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99.03.29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185-1외 4필지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강화군외 1인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돈대는 뒷산에서 해안으로 돌출되어 나온 산능선 끝부분에 위치해 잇고 좌우로 깊게 만곡된 갯벌을 이루고 잇는 津口를 끼고 있어서 가시범위가 상당히 넓다. 돈대 동쪽은 경사가 절벽에 가깝고 그 외의 면도 경사가 급한 편이다. 이러한 지형으로 인하여 반월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돈대는 남북 약 37.3m, 동서 약 16.5m로 내부에는 4개의 포문이 있다. 1개의 포대는 남서쪽에 3개의 포대는 동남쪽에 위치하고, 포좌의 폭은 1.5m, 노이는 1.5m이다.
분오리돈대는 외벽의 30%를 복원하였다. 이 돈대는 동쪽으로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삭축함으로써 절벽화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지형지물을 잘 활용한 결과이다. 이 돈대는 현재 매우 특이한 외형을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이 돈대는 뒷산에서 해안으로 돌출되어 나온 산 능선의 끝부분에 위치해 있는데 좌우로는 깊게 만곡된 갯벌을 이루고 있는 포구를 끼고 있어서 가시범위가 상당히 넓다. 이 돈대는 반원형의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 역시 지형에 맞추어 석벽을 축조한 결과로 보이며 다른 돈대와 마찬가지로 내외를 석축한 협축의 석벽을 이루고 있다.
멀리 공항가는 영종대교다.
입구쪽 모습.
참고
강화돈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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