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106호
명 칭 : 석주관칠의사묘(石柱關七義士墓)
분 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순절지
수량/면적 : 797㎡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17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사유
관 리 자 : 구례군
정유재란 때 전라도지방의 관문이었던 석주관을 끝까지 지키다가 숨진 구례출신 의사(義士) 7명의 무덤이다.
석주관은 경상도지방에서 전라도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안음의 황석산성·진안 웅치·운봉 팔량치와 함께 영남과 호남 사이의 4대 관문의 하나로, 고려때부터 이곳에 진영이 설치되어 왜군의 침략을 막았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은 호남지방을 목표로 하여 이곳을 집중공격하였다. 그러자 왕득인이 의병을 일으켜 적에게 대항하였으나 결국 숨지고 말았다. 그후 왕득인의 아들과 각 지역에서 모여든 의병·승병들이 힘을 합쳐 처절한 혈전을 전개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의병을 희생시킨 채 끝나고 말았다.
순조 4년(1804) 나라에서 왕득인을 포함한 7명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이 내려졌고, 1946년에는 뜻있는 지방 유지들에 의해 칠의각과 영모정이 세워졌다.
석주관성 입구에있는 칠의사묘와 칠의사(七義士)다.
칠의사묘에서 바라본 칠의사모습.
7의사 묘인데, 묘가 8개다.
입구를 들어가면 정면에 또하나의 문이있고,좌 우측에 건물이 하나씩 있다.
좌측에 맛배지붕의 숭의각.
우측에 팔작지붕의 재명각.
석주관성은 재명각 뒤쪽으로 가면 된다.
계단에서 바라본 칠의사.
종 목 : 사적 제385호
명 칭 : 구례석주관성(求禮石柱關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교통/ 도로
수량/면적 : 29,965㎡
지 정 일 : 1993.11.10
소 재 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산65외 12필지
시 대 : 고려시대
소 유 자 : 사유
관 리 자 : 구례군
고려 말기에 왜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진을 설치했는데 임진왜란(1592) 때 전라방어사 곽영이 호남지역의 왜적을 막기 위해 옛 진 위에 석주관성을 쌓았다.
성의 북쪽과 남쪽이 지리산과 백운산의 험한 산줄기이고 그 사이에 섬진강이 흐르고 있어 군사 방어 지형으로도 중요한 길목이다. 경사진 산허리를 따라 만든 성곽의 길이는 약 736m이고 돌로 쌓아 만든 벽의 높이는 50∼120cm이다.
성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갈라놓아 적의 공격으로부터 잘 방어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징이며 성벽 아래쪽과 위쪽의 쌓은 수법에도 차이가 있다.
호남지역에 현존하는 유일한 관문으로서 매우 중요하며, 13세기(고려후기)와 16세기(임진왜란)에 성을 쌓은 기법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유적이다.
석주관의 역사는 구례의 풍부한 물산과 지리적 요충으로서의 위치에서 온다. 구례읍에서 섬진강을 따라 하동 쪽으로 10km쯤 가다보면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는데 좌측으로 높이 약 10m의 낭떠러지가 나오는데 여기가 석주관이다. 이곳은 삼한시대에 마한과 진한의 경계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군사상 요충지였으며 고려 때에는 남해에서 침입한 왜구를 막기 위해, 성을 쌓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튼튼히 하기만 하면 진주에서 구례, 남원을 향해 넘어오는 왜적을 방어할 수 있는 호남의 전략적 요충지로 고려 말 이곳에 진(鎭)을 두고 둘레 500칸의 석성을 쌓아 왜구를 막았다.
조선이 개국하고 정국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진을 폐지하여 황폐되었는데 지금 남은 석축관문은 1592년( 조선 선조 25년 )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전라 방어사 곽영이 고려시대의 진성위에 쌓은 것이며, 경사진 산허리의 정상부를 따라 축조된 현존 성곽의 길이는 736m, 석축 높이는 50~120cm이며, 석축에 일정한 간격으로 단을 두고 단과 단 사이에 타구를 두어, 적의 공격 시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섬진강가의 낭떠러지에서 시작되는 석주관성.
고대로부터 영남과 호남의 4대 관문이 있었는데,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량치, 구례의 석주관이 그것이었다.
특히 남쪽의 석주관과 북쪽의 팔량치는 고대부터 중요한 교통로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하였다.
성곽이 가파른 산등성을 따라 올라간다.
성곽높이는 그다지 높지는 않았으나, 매우 가팔랐다.
자연 암반이 있는곳은 그 위에 쌓았다.
약 400m정도 오르니, 그곳에서부터는 무너진 곳이 보이고...아마 이곳까지는 복원을 해놓은것 같다.
여기부터는 곳곳이 무너진 곳도 보인다.
이리로 계속오르면 왕시리봉인데...
이 가파른곳에 어찌 돌을 날랐으며, 성곽을 쌓았는지...
타구의 모습같다.
여기까지는 또렸한 성곽이 있었으나, 소나무 숲속에들어서며 흔적이 희미해진다.
길이가 730여m라니, 여기까지인것 같다.
바로앞에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거기까지 성곽이 있는게 아니었을까?
봉우리에 올라서니, 성곽의 흔적을 찾을수 없었다.
다시 돌아 내려간다.
구례군청 홈페이지를 보니..석주관성에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있다.
조선이 개국하고 정국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진을 폐지하여 황폐되었는데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성을 쌓고 구례 현감인 이원춘에게 석주관 방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때의 축성작업은 정식 축성이었다가 보다 전란을 맞아 급하게 축조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는 현재 남아있는 성곽의 잔존부를 통해 쉽게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이곳 석주관에 고려말 때처럼 만호진을 설치하여 왜구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활용되지 못하고 황폐화되어 현재에 이른다. 성벽의 전체길이는 약 750m이며 높이는 1∼1.5m, 아래폭 1.4∼1.5, 윗쪽 70∼90㎝ 정도로 대부분은 무너져 훼손된 상태로 근래에 들어 다시금 복원을 하고 있다.
섬진강위에 놓인 석주관성의 모습이다.
이렇게 성곽이 끝난다.
석주관성은 섬진강에서 시작되어, 가파른 산등성을 타고 약 300여 고지까지 쌓은 성이다.
여느산성보다 가파른것이 특징이고, 성곽높이는 그다지 높지 않았는데, 아마 적군이 올라오며 체력이 다 소진됨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하며 석주관성 답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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