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36호 (종로구)
명 칭 : 천도교중앙대교당(天道敎中央大敎堂)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민족종교/ 천도교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78.12.18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경운동 88
시 대 : 일제강점기
소 유 자 : 천도교
관 리 자 : 천도교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문화진흥과 02-731-1170
천도교의 중앙교당으로 종교의식과 일반행사를 하는 곳이다.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의 주관으로 1918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21년에 완공되었다. 교인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공사비로 충당하였는데, 공사비에서 남은 돈은 3·1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벽은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인데, 철근 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하였다. 또한 앞면에 2층 사무실을 탑 모양의 바로크풍으로 하여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에는 서울시내 3대 건물의 하나로 꼽혔으며, 교회당의 구조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3대건물중 다른 두개는 명동성당과 조선총독부 건물)
1919년 7월 일본인 중촌여자평(中村與資平)에게 대교당의 건축설계를 맡기고,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에게 이를 시공시켰으며, 일본인 기사 고곡호시(古谷虎市)가 총감독을 맡아 이 건물을 완성시켰다. 즉 대교당은 착공한 지 1년 반이 지난 1921년 2월 28일에 완공되었고, 그 공사비는 대략 22만여원에 이르렀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였고 벽체는 붉은 벽돌로 건축되었다. 탑의 지붕은 바로크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건물을 전체적으로 볼 때 기독교 교회당과 비슷한 구조를 닮으면서도 이와는 전혀 다른 맛을 지니고 있다. 건물 구조는 벽돌로 지은 4층건물로서 1층의 건평은 212.8평, 2층은 45.6평, 3층은 14.44평, 4층은 7.84평, 합계 280.68평으로 되어 있다.
이곳 대교당의 설계는 당초 현재의 3배 이상의 규모였으나 일제는 건물내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이유로 건축허가를 반대하여 부득이 현재의 규모로 겨우 허가를 얻게 되었다. 허가를 받은 후에도 왜경은 건축공사의 철근, 벽돌, 자재 등의 구입을 방해하면서 시공자를 구금하기도 했다. 다사다난했던 우리 근대사에서 일제하에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설립된 것은 곧 3.1운동의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다. 천도교 대교당은 당시 서울에서 규모로 보아 3대 건물 중의 하나였으며, 우리민족 신문화운동의 산실로 자유수호와 민주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천도교 대교당을 구조면에서 살펴보면 전체적인 평면형은 마치 에집시안 크로스(Egyptian Crose)처럼 되어 있으나 기독교 교회당들의 평면과는 다른 하나의 강당과 같은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벽체는 붉은 벽돌로 쌓았으며, 지붕은 맞배로 되어 있다. 건축양식상 바로크 양식의 독특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일반 교회당들의 모양을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독특한 멋을 지니고 있다. 내 외부에는 배달민족을 상징하는 박달나무 꽃, 무궁화 등이 특이하게 조각되어 있다. 교당의 수용인원은 1,000명.
내부는 200평이 넘는 큰 큐모인데 기둥이 하나도 없다.
사용된 문양도 한국적인것을 사용했다한다.
순수 한국종교인 천도교.
천주교와 개신교의 범람속에 묻혀버린 우리것들중 하나가 아닐까?
천주교와 개신교가 빼앗은 우리의 종교가 아닐까?
나아가 천주교와 개신교에 빼앗긴 우리의 정신이 아닐까?.....
천도교 건물은, 운현궁 길 건너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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