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전시장

남양주 실학박물관

오솔 길 2011. 6. 15. 11:48

조선후기 개혁․실천의 학문인 실학사상을 연구하고 교육․전시하여 현대적인 가치로 계승 발전시킬 실학박물관이 오는 2009년 10월 23일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역사적인 개관을 한다. 실학박물관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소재한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 유적지 바로 옆에 대지 면적 4075m²(1200여 평), 연면적 2038m²(600여 평) 규모의 2층 건물로 들어섰다.

 

박물관에는 ‘실학의 형성(제1전시실)’과 ‘실학의 전개(제2전시실)’, 그리고 과학적인 사고의 전환으로 이루어진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제3전시실)’를 전시하는 3개의 상설전시실과 이와 별도로 구성된 기획전시실, 교육․체험교육을 진행할 강당(80석) 등과 이외의 부대시설이 갖춰져 있다. 상설전시실에는 대표적 실학유물 130여점이 실학자들의 가장본(家藏本)과 수고본(手稿本)을 중심으로 전시될 예정이며, 다양한 기획전시의 개최를 통하여 보다 심층적으로 실학사상을 소개할 계획이다. 또 기획전시실에서는 조선후기 최대의 개혁정책중 하나로 평가되는 대동법(大同法)과 그 추진자였던 김육(金堉)의 사상을 조명하는 ‘김육(金堉)과 대동법(大同法)’을 전시할 계획이자. 10월 23일 개관 후에는 연중무휴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7시까지 무료로 운영된다.

 

초대 실학박물관장에는 대표적인 실학자로 알려진 다산 정약용의 사상을 평생 연구해온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임명됐다. 안병직 관장은 실학박물관의 운영 목표를 크게 보아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 번째가 국내외 실학 자료의 집대성과 체계화를 추구하며, 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그 결과를 국민(도민)들에게 교육․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돌려주는 전문 실학연구원으로의 지향이다. 이를 위해 학계의 실학전공 원로 학자와 국민(도민)이 직접 접촉하는 석좌교수제의 도입과 초․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실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실학사상을 주제로 전시를 재미있게 즐기면서 체험․학습하는 전문박물관으로의 지향이다. 실학박물관의 전시목표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조선후기의 개혁과 변화를 주도했던 신학풍인 실학을 적극 이해하는데 있다. 따라서 관람객들은 실학박물관의 전시 관람을 통해 실학사상을 발견하고, 실학적 가치를 경험함으로서 궁극적으로 실학정신을 현대에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특히 전시 자료가 대부분 서지(書지誌) 유물이라는 한계를 스토리텔링과 다양한 영상 등의 전시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흥미요소로 전환하였다. 또 일반적으로 시대를 중심으로 하는 나열식의 전시 구성보다는 실학자의 의지, 열정, 역경 등을 보여줄 수 있는 주제별 전시를 통하여 실학의 개념을 정확하고도 쉽게 이해하고 느끼는 문화체험공간으로 꾸몄다.

 

한편 실학박물관은 중장기적으로 남양주시에서 관리․운영하고 있는 다산유적지와 경기도 팔달상수원관리사무소에서 조성계획하고 있는 생태공원을 통합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들이 통합 운영된다면 능내리 일대는 실학박물관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실학연구의 센터로서 기능함은 물론, 국민(도민)의 문화휴식공간으로 충분한 기능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 점에서 안병직 실학박물관 관장은 다산선생의 생가를 적극 활용하여 ‘다산서당 운영’, ‘다도(茶道) 체험’, ‘실학자들의 생활 체험’ 등 다산유적지를 활용한 다양한 교육, 체험 프로그램 개발 및 실시하고, 다산기념관․다산문화관 등 기존의 시설을 리모델링하여 다산의 가장품(家藏品; 家藏本․手稿本)을 중심으로 한 체계적인 전시를 통해 다산사상의 개념을 국민(도민)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 '시대정신'에서


http://www.silhakmuseum.or.kr/

 

실학 박물관 

 

앞에 홍이포가 놓여있는데, 중국에서 가져온것이라한다

더우기 우리나라 여러곳에 전시되어있는 홍이포는 실제 발사가 불가능한 모델에비하여, 이곳 홍이포는 실제 발사가 가능하고 고증을 통헤 당시의것과 똑같이 만들었다한다

 

 

그리고 정약용이 수원화성 축조할때 사용한 거중기

 

 

 

 

 

 

박물관은 2층부터 관람하게 되어있었다

 

실학의 형성관이다

컬럼버스부터 시작되는 실학

 

 

 

조총.

처음에는 성곽을 방어하기위한 수단으로 무척 컸다

 

실학이 전해온 과정으로, 천주교가 역할이 컸다

 

당시의 자명종

 

그리고 망원경

 

실학이 형성된 당시의 조선상황

 

 

다음은 실학의 전개다

경새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실학의 중요한 학파다

 

 

 

 

실학의 전파

 

경세치용학파 (經世致用學派)
토지개혁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주장했던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계열의 학자를 가리킨다. 주로 상업발달과 기술개발에 많은 관심을 두었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대개 북학파를 지칭함)에 대칭되는 개념이다.

 

경세치용이란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학문을 가리킨다. 17세기 이후로 중세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자 일련의 지식인들은 과거를 위한 경학공부에만 치중하거나 사회변화를 무시하고 전통적인 논리와 제도만을 고집하는 데 반대하여 경세치용을 위한 학문을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17세기 고증학의 제창자인 고염무(顧炎武)와 황종희(黃宗羲)의 학문을 경세치용학이라고 불렀다. 경세치용은 원래 유교경전에 있는 용어이다. 유학은 본질적으로 치자(治者)의 학으로 정치경제학을 포함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이전에도 여러 종류의 경세론이 항상 제기되었으며, 사회가 변혁기에 처했을 때 구태의연한 학자들의 태도를 비판하며 유학의 본질을 회복할 것을 주장한 경우는 많았다. 일례로 여말선초에는 정도전·조준·권근 등이 사장(詞章)에 빠진 학자들을 비판하며, 자신들의 개혁론의 사상적 기반인 정주학(程朱學)을 실학이라고 불렀다. 또한 불교나 도교의 경세론으로서의 한계를 비판하며, 주자학을 실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후로도 사회의 폐단을 거론하며, 개혁안을 제시한 학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양란(兩亂)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농민층 분해의 진전, 신분제 붕괴, 서구 자연과학과의 접촉 등은 일련의 학자들이 지주제와 신분제에 기초한 중세사회의 원칙을 넘어선 개혁을 추구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후 실학자들이 주장한 경세치용은 중세사회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내포했으며, 주자학의 원리를 고수하며 부세제도 개혁과 국가기구 운영의 정상화 등을 통한 사회안정을 주장하는 보수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용후생학파 (利用厚生學派)
조선 후기 실학의 한 분파로 상공업 발달을 중시한 학파.

 

실학은 조선 후기 특수한 사회적·경제적 상황 속에서 산출된 사상으로서 무엇보다도 공리공담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는 학문이며 그것을 통해 현실을 개혁하려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이다. 나아가 실제 사회에 이용될 수 있는 이용후생의 학문이었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수록된 '이용'이란 백성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한 각종 기계나 운송수단 등을 말하며, '후생'이란 의복이나 식량 등을 풍부하게 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대체로 18세기 이후 실학의 흐름은 이익으로 대표되는 경세치용학파와 박지원·박제가·홍대용으로 대표되는 이용후생학파 및 완당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룩하게 된 실사구시(實事求是)학파로 대별된다. 그러나 이 세 유파가 제각기 학문분야를 달리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념과 방법에 있어서는 모두 당시의 관념적인 주자학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차원을 지향하여 실용과 실증을 창도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었다. 그중 이용후생학파는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일반기술면의 발전을 지표로 하고 있어서 중상학파라고도 하며, 개혁의 모델을 청조(淸朝) 문물로 두고 있어서 북학파라고 지칭되었다.

 

 

실사구시 (實事求是)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로 중국 청대(淸代) 고증학(考證學)의 학문방법론.

 

이러한 학문 태도는 우리나라 실학파(實學派)에도 영향을 미쳤다. 실사구시라는 말은 〈후한서 後漢書〉 하간헌왕덕전(河間獻王德傳)에서 나온 말이다. 청나라초에 고증학을 표방하는 학자들이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일삼는 송(宋)·명(明)대의 학문을 배격하여 내세운 표어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대진(戴震)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주자학적 경전(經典) 해석의 극복, 다양한 사회개혁론(社會改革論)의 제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실학파가 나타났는데, 이는 이러한 학문 경향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정약용의 경우 경전 해석에 있어서 주자학의 체계를 극복하는 길을 옛 공자(孔子)의 정신을 회복하는 데서 찾고, 그 방법으로서 철저한 고증·실증적 태도를 중요시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주희와는 다른 경전 해석을 제기했는데, 당시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과 사회의 실용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토지제도와 신분제도의 개혁을 주요내용으로 한 실학파의 사회개혁 요구는 당시의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워 많은 탄압을 받아 지배층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이때문에 당시의 실학파 중 성호학파(星湖學派) 중심의 경세치용(經世致用)적인 유파는 거세되고, 실사구시의 측면만이 엄격한 학문방법론으로 추구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북학파(北學派) 계열의 김정희(金正喜)이다. 김정희는 종래 실학의 사상성(思想性)과 사회개혁의 정열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지만 선배 실학자들의 실증적 연구방법을 계승하면서 민족문화에의 침잠(沈潛)을 통해서 주체적 인식을 선명히 하고 금석(金石)·전고(典故) 등에 관한 격조 높은 학문성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학문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엄격한 객관적 태도로써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그는 〈실사구시설〉에서 "실사구시는 학문을 하는 데 가장 쓸 만한 방법이다. 만약 실사를 일삼지 않고 공소(空疏)한 학술만을 편하다고 여기고, 그 옳음을 구하지 아니하고 옛 사람의 말만을 위주로 하면 성현의 도가 아니다.……학문의 도는……마땅히 실사구시해야 하며 공허한 이론을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 대저 성현의 도는 실천궁행하는 데 있으니,……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되, 오로지 실사구시 한마디 말을 주로 하여 실천하면 된다"고 하여 실사구시의 방법론과 그 실천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청대 고증학의 학문적 성과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차차 고문학(古文學)에서 금문학(今文學)으로 눈을 돌려 위원(魏源)과 같은 학자의 학문을 '실사구시'로 인정하면서, 그의 〈해국도지 海國圖志〉를 해방(海防)에 필수적인 책으로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는 후에 개화파(開化派)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오경석(吳慶錫) 등 중인(中人) 출신의 인재들과 교유함으로써, 이러한 학문경향과 방법론의 저변 확대에 기여했다.

 

 

 

중국과 일본도 실학이 발달했다

 

 

 

다음은 천문

 

 

혼천의

왼쪽이 중국, 가운데가 조선, 오른쪽이 일본이다

 

 

통도사 금동천문도

 

 

 

 

 

천구의

왼쪽이 조선, 가운데가 일본, 오른쪽이 중국것이다

 

지도생성기

 

 

고지도

 

 

 

 

1층으로...

 

실학과 생활이다

 

 

 

의복에도...

 

무기에도...

 

생활도구에도...

 

 

수레가 아주옛날부터 있던것이 아니었구나...

 

 

 

마지막으로 도사관겸 휴게실

 

실학박물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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