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사적 제216호(1971. 3.26)로 지정되었으며 포곡식 석성, 전략성구조이다. 가산의 해발 901.6m에서 산골짜기를 에워싸 해발 600m에 이르도록 내·중·외성을 축조하였는데, 현재 사문지(四門址)와 암문(暗門)·수구문(水口門)·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있다.
처음에는 인조17∼18년(1640)에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의 요청으로 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26년(1648)중수되었고 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4,710보(步)이고 여장(女墻)1,887첩(堞)이 설치되었으며, 동·서·북문의 삼문과 8개소의 암문·연못9개소·우물2개와 장대인 진남대(鎭南臺)·창고 7개소·빙고(氷庫)하나·사찰4개등이 설치되었다. 성이 완성되면서 칠곡도호부가 되고 군위, 의흥, 하양, 신녕의 고을이 이 산성에 예속되었다.
외성은 숙종26∼27년(1701)에 석축으로 축조된 것으로 둘레는 3,754보이고 1,890첩의 여장을 두었으며 성문은 남쪽에 만들고 북·동·남쪽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중성은 영조17년(1741)에 관찰사 정익하(鄭益河)의 요청으로 길이 602보이고 402첩의 여장과 중성문이 만들어졌다.
산성 별장이 거처하는 위려각(衛藜閣)을 비롯하여 성안에는 객사(客舍)인 인화관(人和館)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 군기고, 보루(堡樓), 포루(砲樓), 장대(將臺)가 설치되어 행정적이라기 보다는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이 압도적인 군사용 진성(鎭城)의 면모를 갖추었다.
중요시설은 내성안에 있으며 중성에는 이 산성에 입보(立保)할 예정된 네 고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와 군기(軍器)를 보관하여 유사시에 사용하게 하였다. 성은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성의 주변에는 송림사를 비롯한 신라시대의 절터가 많이 있다.
1954년의 집중 폭우로 남문에 홍예(虹霓)는 반파되고 수구문과 성벽 일부가 유실되었다. 그밖의 성벽과 암문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세는 천주사지(天柱寺址)로부터 급경사를 이루어 가파른데 약간 평탄해진다. 성문은 외성의 남문이 홍예문이며, 다른 성문들은 앞쪽만 홍예이고 뒤쪽을 평거식(平据式)으로 만든 특수한 문의 구조로 되어있다.
남보루(南堡樓)는 성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데 여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따로 성벽을 현대의 교통호(交通壕)처럼 설비한 용도(甬道)가 있어서 조선후기의 축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인조실록)에 의하면 인조17년 4월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이명웅이 사조(辭朝 왕에게 부임인사)때 '경상도 60州 산성중에 믿을 만한 곳은 진주, 금오, 천생의 3성뿐이므로 적지에 축성할 것'을 상계하여 허락을 받고 도임후 천생산성은 형세가 험하기는 하나 좁고 천정이 없으므로 금오산성을 가축하는 한편, 최적지인 팔거현의 가산에 축성할 것을 계청하고 그 해 9월부터 인근 고을의 남정 10만여명을 징발하여 성을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1640) 4월에 일단 내성을 준공하게 되나 막대한 인력과 자금의 소요 및 어려운 공사로 인한 사상자 발생으로 민심이 동요되어 이 관찰사는 인조19년7월에 타직으로 이임되고 그후 새로 부임한 관찰사 이만과 칠곡도호부사 이지성에 의해 인조26년(1648) 내성이 중수되었으며 외성은 숙종26년(1700) 관찰사 이세재에 의해 중성은 영조17년(1741) 관찰사 정익하의 노력으로 축조되었으니 거의 100년에 걸친 대공사였다.
산정엔 나직한 7개의 봉으로 둘러싸인 平頂을 이루어 사방으로 7개의 곡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 임란시 곽재우 장군이 왜병을 물리친 천생산성(구미시 지방기념물제12호)과 6.25전쟁당시 대구사수의 격전지였던 유학산에 연결되어 산성을 축조할만한 충분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하는 동래-밀양-대구-상주-충주-서울을 잇는 상경로의 요충지로서 임란때에는 명의 원군 5천여명이 진주하였으며 선조26년(1593)에는 경상감영을 설치하여 선조29년 달성으로 감영을 옮기기까지 도정을 관장하였다. 그후 산성을 축조하여 산성안에 칠곡도호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보통 읍성은 나성이나 가산산성은 내외중성으로 된 전략적 성곽으로 축조되었으며 인조18년(1640) 산성이 축조되면서 5월에는 경산부(星州)에 속했던 팔거현이 칠곡도호부로 승격되고 이곳 산성안에 칠곡도호부(府使:武三品)를 설치하여 진관으로 군위, 의흥, 신녕, 하양의 4현을 관장케 하여 이후 180년간 읍치(부의 治所)를 산성안에 두었으며 순조12년(1812)에는 가산산성안에 별장(종구품, 전력부위, 지방의 산성·나루·보루·소도등을 수비하는 무관)을 두고 『가산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칠곡도호부는 관아가 험준한 산정에 있게 된 후 읍민들은 불편한 점이 많아 이읍을 바랐으며 순조19년(1819) 왕명에 의하여 평지인 팔구지(현 칠곡초등학교)로 읍치를 옮기고 이후로 가산산성의 수성은 가산진의 별장이 담당하였다.
성내의 사방에 포루, 장대, 남창, 군창, 영창, 군기창, 장적고 등의 창고와 문루가 있었다고 하나 남아있는 곳은 없으며 다만, 남창마을과 북창마을의 명칭에서 남창지와 외북창지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외,중성과 동문, 동암문은 보존되고 있다. 또한 산성내에는 보국사, 천주사등 많은 사찰이 건립되어 승장을 뽑고 승려들을 모아 궁술을 연습시켰다고 하나 현재 일부 사지의 주위에 당간지주만 남아있으며 「장군정(將軍井)」이라고 하여 장군들이 마셨다고 하는 우물이 남아 있어 산성내에 많은 병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4. 7.26(음6.27)폭우와 산사태로 外城의 정문인 남문성벽과 수구문이 붕괴되었는데 이때 외성안에 있던 남창마을(진남문 위쪽 약 50호 200명)이 매몰(35호, 24명사망)되어 미군부대의 지원으로 남원2리에 새로운 마을(新興:새마을, 新南倉:새남창)을 조성, 이주하였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총 1억7천5백여만원을 투입하여 남문루 및 남문의 성곽과 수구문, 女墻(여장:성위에 낮게 쌓은 담.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한 타구가 있다)185m, 중문등을 복원, 중수하였으며 1992년에는 4천3백만원을 투입하여 중문을 보수하였고 1999년에는 산성 진남문여장, 동문 해체보수, 동문 성곽 99.5m를 2억5천8백만원으로 보수하였다.
내성 약 4.0km (인조 17∼18년(1640), 26년(1648)중수)
외성 약 3.0km (숙종 26∼27년(1701)
중성 약 0.6km (영조 17년 (1741)
밖에서 본 문으로 암문이 맞는것같다.
암문주변의 성곽은 다 무너진 상태다.
여기는 잡목을 다 제거해서 가기가 편했다.
바깥쪽에 잘 남아있는 성곽.
그러나 무너진구간이 더 많았고...북문에서 서문까지는 거리는 얼마되지 않지만 성곽상태는 별로 좋지가 않았다.
계속 오름길이다.
다시 무너지지않은 성곽을 만난다.
그리 길지는 않았다.
저기서 방향을 서쪽으로 90도 꺾는다.
많이 무너진 성곽이다.
암문이 보인다. 바깥쪽.
안쪽모습.
천혜의 암문이다.
밖은 거의 수직절벽이고 양쪽으로 바위다. 적군이 도저히 올수가 없겠다.
다시 성곽이 옹성형태의 구간으로 이어진다.
기와가 있는것으로보아 건물이 있었을것이다.
성곽이 무너진곳도있고, 이어진곳도있고...
서문이 보인다.
서문 안쪽.
밖의 모습.
서문주변도 훼손이 많이됐다.
그러나 서문을 벗어나자 성곽상태가 점차 좋아진다.
아주 깨끗한 성곽.
일부 무너진곳에서 보이는 속쌓기.
여기부터 완벽한 구간이다.
위로 올라와 성곽을 따라간다.
안쪽모습으로 여장의 흔적이다.
잘 남아있는 서쪽성곽.
내려가 보았다.
미석의 상태도 보이고...
축조모습이 다른곳과 약간 다르다.
단면을보니 문이있던 자리같다.
가산바위다.
가산바위부터도 성곽상태가 아주 좋았다.
아마 가산산성에서 가장 양호한 구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위로 올라왔다.
이부근에는 성곽상태가좋아서, 한번 내려가면 올라올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성으로 이어지는 성곽.
영조때 (1741년)쌓아서인지, 100년전에 쌓은 내성과 축조방식이 다르다.
중문으로 이어지는 중성.
따라가 본다.
많이 무너진 모습.
아까왔던 중문이다.
중성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다시 내성 서쪽성곽을 따라간다.
뒤돌아 본 모습으로 성곽상태는 아주 좋은데, 잡목이 많아 알아보기가 힘들다.
내려서 보았다.
높이 약 2m의 양호한 성곽이다.
다시 위쪽길로 걷는다.
지나온 방향.
암문이다. 잘 안보여서 자칫 지나치가 쉽다.
밖의모습으로 입구를 막기쉽게 되어있다.
이부근은 많이 무너져 있었다.
다시 성곽위로 걸어간다.
상태는 좋았고, 성곽길또한 호젓하니 좋았다.
마치 망루처럼보이는곳으로, 높이가 6-7m는 되어보였다.
뒤돌아 본 모습. 높이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되어있었다.
내성은 아주 잘 쌓았다는 결론이다.
성곽이 저 봉우리로 연결된다.
저 봉우리가 2중성곽이 합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드디어 내성의 종착점이다.
이 밑에 암문이있고, 암문지나 옹성형태를 이루며 동문으로 이어진다.
암문 안쪽.
바깥쪽 문으로 아까 왔던곳이다.
내성밑부분으로 자연암반이고..여기서 외성이 시작된다.
내성은 둥근 옹성형태를 보이며 90도돌아 동문으로 향한다.
내성과 외성.
외성 시작이다.
내성은 동문으로 돌아가고....
아까 봤던 건물터다.
양쪽으로 성곽이다.
건물 왼쪽성곽은 동문에서 이어지고...
건물 오른쪽 성곽은 내성에서 남문으로 이어지고...
양쪽성곽이 이 봉우리에서 만난다.
봉우리에 오르자 남문이 보이고...
봉우리 밑까지 치밀하게 쌓은 성곽이다.
봉우리는 자연암반이라 성곽이 필요없었을 것이다.
봉우리 밑에서 다시 시작되는 성곽이다.
밑에는 무너진 부분이 많았다. 그러면 호젓한 길로 들어선다.
상태좋은구간도 많았다.
문이있던 흔적이다.
아주 잘 남아있는 구간.
안쪽 모습으로, 이정도면 거의 원상태 그대로다.
남문으로 이어진다.
드디어 남문이다. 복원한 여장이다.
영남 제일관.
문을 나서며 가산산성 답사를 마친다.
작년이맘때 가산산성을 반쯤 답사했었다.
그때 두시간이 조금 넘게걸려서 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무려 8시간 반이 걸렸다. 네다섯 시간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는데...
얏잡아보다 큰코다친적이 한두번이 아니건만, 이번에는 왜 그랬을까?
900m급을 쉽게본 것이다. 같은 7Km구간이라도 400m급과 900m급은 다른것이다.
얼마전에 강화산성 7.6Km를 다녀와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화산성은 200m급 이였다.
8시간반을 사과한쪽과 물한통으로 버틴것이 힘들었고, 특히 북문에서 서문구간은 그 댓가를 톡톡히 치루었다.
오래전에 물때문에 고생한적이있어, 그나마 물 넉넉히 가지고가서 간신히 답사를 마치게 되었다.
가산산성은 다른 어느산성보다 개성이 강했고 비교적 상태도 좋았다.
내성,외성,중성의 구분도 뚜렸했고, 특히 내성의 견고한 성곽이 인상적이었다.
잡목을 제거하고 등산로와 성곽길을 구분하여 더이상 훼손을 막는다면, 세계에 내놓을 훌륭한 한국성곽이 되지않을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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