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병자년을 거울 삼아!(강화가 한눈에 들어 오다!)
숙종때 영의정 허적은 숙종의 명을 받고 병자년의 치욕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대비의 일환으로 강화도를 완전한 보장지지로 만들기 위해 준비를 하는데 이로서 숙종 연간에 53대 돈대를 만들게 되고 특히나 이 돈대의 상당수가 강화와 김포를 사이에 둔 염하(강화대교 아래 강같은 바다)에 만들어 지게 된다.
숙종 1년에 강화를 다녀온 허적의 말을 들어 보자!
ꡒ강도(江都)가 전에는 진창이었습니다만 지금은 견고(堅固)한 강토가 되어서 곳곳에다 모두 배를 댈 만합니다. 그러나 적(賊)이 만약 우리 나라 사람을 길잡이로 삼아서 경강(京江)으로부터 물줄기를 따라 내려오면 진실로 방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마니산(摩尼山) 아래 수 십리의 땅이 물기가 축축하여 사람들은 다닐 수가 없고 다만 조수(潮水)가 찰 때만 적의 배가 정박한다면 약간의 군사만 쓰더라도 방어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형세로써 살펴본다면 강도의 동북방(東北方)은 지키기 어렸지만 서북방은 방비하기 쉽겠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동북쪽의 물가를 수치(修治)하여서 곳곳에 조그마한 성(城)을 쌓고 성에 들어와 지키는 군사는 마땅히 승군(僧軍)을 사역(使役)해야 하며 군량미(軍糧米)는 2만 석이면 넉넉할 듯합니다. 정족 산성(鼎足山城)은 쓸모가 없는 성인데 그때에도 3만 석의 쌀을 비축해 놓았기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이 ꡐ삼만석 성ꡑ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만약 이만한 물력(物力)을 들여서 쌓으면 강도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통진(通津)의 문수산(文殊山)은 강도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병자년에 적이 문수산에 쳐들어와서 장선(裝船)을 끌고 내려왔는데도 우리 군사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기에 전쟁에 졌습니다. 만약 조그마한 성을 문수산에 쌓아서 웅거하여 지킨다면 적이 오고 가는 것을 피리를 불고, 기를 휘둘러 통지(通知)할 수가 있습니다. 덕포(德浦)도 성을 쌓을 만한 곳이니, 비록 작지마는 험준(險峻)합니다. 겨울철에 갑진(甲津)에 얼음이 녹아서 흐를 때에 덕포만은 배를 수용(受容)할 만합니다. 그러니 만약 이곳에 성이 있게 되면 위급할 때에 먼저 이 성에 들어가서 배를 정돈하여 건너면 갑자기 닥치는 근심을 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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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喬桐)은 땅이 매우 작으며 군영(軍營)의 뒤에 산이 우뚝 솟아 있고 옛성이 있습니다. 그 성에 오르면 온 지경을 내려다볼 수 있고 평야(平野)도 또한 많으니 백성들이 살기에 좋습니다. 그리고 사면(四面)이 비록 땅이 물기가 축축한 데는 없습니다만 수면(水面)이 넓고 수초(水草)가 많기에 외적(外賊)이 침범(侵犯)하기가 어려우니, 땅의 형세는 강도(江都)보다 나은 듯합니다. 다만 땅이 좁고 작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과 백관(百官)들을 다 수용할 수가 없으니, 형세가 반드시 강도를 귀착지(歸着地)로 하고 자연도(紫燕島)와 교동은 이를 보좌(補佐)하는 곳이 되겠습니다.ꡓ
허적의 의견에서 몇가지를 추정할수 있다.
첫째는 강도(강화도)의 서쪽은 광대한 갯벌이 펼쳐져 있으니(지금의 장하리, 선두포 근방임) 그 방비가 소수의 군인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나 김포와 인접한 염하 해안과 강화의 북쪽인 조강 연안은 소수의 진보로서는 보장지지(保藏之地))라 할수 없다는 불안감이 있다하고,
두번째는 정족산성은 전략적으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사실을 알수 있고
세번째로는 덕포진과 문수산성이 숙종1년에는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즉 병자년에 염하에 배를 정박 시키지 않음으로 청병이 건너올 수 없을 것이라 안심하고 방비에 소홀하였는데 청병은 강화를 한눈에 내려다 보는 문수산에 올라 방비가 소홀함을 알고 해전을 치른 경험은 없었지만 수전을 치른 경험으로 집을 헐어 땟목을 만들어 강화도에 이르는 방법을 고안해 강화를 함락시킨 것을 알수 있다.
네번째로는 강화가 함락되면 다음의 보장지지로서는 교동과 자연도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뭏든 병자년의 치욕을 갚기 위해 효종과 숙종은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50여개의 진보와 문수산성, 덕포진 그리고 영조때 강화외성을 전돌로 쌓음으로서 강화는 보장지지로서의 확고한 입지를 세우게 되었고 전략적 요충지로서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2)문수산성의 건설
임금이 말하기를,
"문수산은 형세상으로 보아서 성을 축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공사를 하기로 단정한 것이다. 문수산은 강도(江都)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적(賊)이 만일 먼저 점거한다면 강도는 반드시 지키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지금 이미 공사를 시작하였으니, 중간에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ꡓ
하였다.
이때가 숙종 20년(1694년)의 일이다. 당파간 싸움이 치열한 때라 성을 쌓는것도 왕의 의지만으로는 쉽게 할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을 쌓도록 제안한 시기가 20년이 지난 후 완공에 이르런 것이다
더우기 문수산성은 그 성의 운용에 대단히 어려움이 있었다.
지사(知事)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ꡒ문수산성(文殊山城)은 아주 강도(江都)의 요충(要衝)이 되는 땅인데, 이미 성을 쌓았다가 문득 버리게 되니 실로 애석합니다. 마땅히 1천여 보(步)를 더 쌓고 통진부(通津府)를 성 안으로 옮겨서, 갑진(甲津)과 마주 대하여 험요(險要)로 삼을 것이며, 또 김포(金浦)의 군사를 여기에 소속시켜 전란(戰亂)에 임하여 굳게 지키는 계책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에 물으소서.ꡓ
하였는데, 임금이 이때 바야흐로 큰 흉년이므로 고을을 옮길 수 없다는 이유로 조용히 의논해 정할 것을 명하였다. 이유가 일찍이 문수산성과 강도(江都)의 지세(地勢)를 가서 살펴보고 오기를 스스로 청하여 갔다 왔기 때문에 건의하여 아뢴 바가 있었으나,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수산성은 172년이 지난 후 프랑스군의 조선 침략으로 전략적 중요성을 여실히 증명하였다. 프랑스군은 왕도를 위협하기 위해 100여 병력을 파견하여 통진부와 문수산성을 공략하게 하였는데 프랑스군이 강화를 건너 육지에 이르자 문수산성에서 조선군에 의한 공격이 먼저 시작되었다고 리델신부는 기록하고 있다.
과연 조선군이 먼저 공격을 했는지는 의문이 간다.
왜냐면 조선군의 문수산성 주둔병력은 불과 50여명에 불과 했고 통진부의 군사는 아직 지원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뭏든 한성근 휘하의 군사들은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퇴각을 하게 되었고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명의 목숨을 잃었다.
이 세명의 군인들은 갑곶 언덕에 묻혀 있다고 기록에 나와 있는데( 리댈신부의 종군기) 지금의 갑곶 천주교회가 있는 근처가 아닌가 싶다.
프랑스군은 그들의 죽음을 보복이라도 하듯이 공해루 ,취가루등의 누각을 붙태웠다. 이로써 왕도로의 진격은 중단되었다.
(3) “김포의 금강산” ,문수산성을 오르다
여러가지 자료를 찾아 봤지만 문수산성이 있는 산의 이름이 왜 문수산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금강산은 예로부터 문수보살이 계신곳이라 하지 않는가. 이곳 김포의 문수산에서도 이의 아름다움을 가히 느낄수 있다 하여 이곳을 “김포의 금강”이라 이름을 붙이기 된 연유가 아닌가 싶다.
금강산이 산 자체의 아름다움과 주변의 아름다움을 겸비한 곳이라면 이곳 문수산은 산 자체의 아름다움은 감추고 전경을 더욱 아름답게 드러낸 곳이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합수지점이 한눈에 조망되고 김포평야와 강화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곳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상봉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이 보일때도 있다.(맑은 날에 필자도 본적이 있다)
또한 일산과 화정지구의 모습이 아스라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치는 곳은 서울 근교의 어떤곳보다 이곳이 제일 인양 싶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한 사실을 상기할 때, 교만으로 콧대가 높은 사람은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이곳 문수산은 자기를 낮추고 외관을 높이는 그러한 곳이다.
강화대교에 못미쳐 우측에 문수산성 표지판이 있다, (냉면집 모란각이 있음)그곳으로 가다보면 지금은 복원되어 있는 문수산 남문을 보게 된다, 계속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산림욕장 표지를 따라 우측으로 가면 문수산 밑에 이르게 된다.
만약 우측으로 가지 않고 계속 직진을 하면 문수사와 서문에 이르게 되는데 이들 남문과 서문,그리고 염하변에 이어진 산성은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의 포격에 의해 무너진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문루는 복원이 되었고 다만 염하변 성벽만이 과거의 모습에서 지워졌다.
서문을 지나 계속 가보지는 못했으나 조선후기 "강화지도"상에 의하면 암문이 중간에 있고 문수산으로 성벽이 꺽어져 북문이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남문, 서문, 북문이 있고 산성위에 자그맣게 문루가 없는 동문이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김포,통진을 거쳐 길손들이 강화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문수산성의 남문을 거쳐 서문을 통과해 강화의 갑곶으로 가게 되어 있다.(강화의 갑곶에는 조선시대나루 석축로가 지금도 있다... 강화의 진해루에도 역시 석축로가 있었다)
또한 문수산 상봉(문수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는 군대를 지휘하는 장대가 있고 그 아래에 건물들이 몇개 보이는 데 그곳이 문수사인지 진의 지휘부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면 리델신부의 종군기에는 문수사가 관측소의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문수산성이 숙종 이후 소규모의 병력만 주둔하였기에 문수사를 지휘부로 이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뭏든 산림욕장에 도착하면 아래, 위 주차장이 있는데 위측에 주차한 후 큰길을 따라 가다보면 전망대라는 표지판이 보이면 전망대길로 올라가면 된다. 물론 주차장 바로 위에 있는 산림욕길로 가도 되지만 그러면 제대로 된 문수산을 감상할 수 없다. 그 길은 가파른 언덕이라 산성을 제대로 조망하기 힘들므로 반드시 내려올때 산림욕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전망대까지는 1KM 라고 하는데 약 30분이면 족하다. 전망대 오르기 전에 표지판을 평탄한 지대에서 만날 수 있는데 반대편으로 가도 염하를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계속 전망대 표시로 올라가면 산성에 이르른다.
전망대에 이르면 과연 이곳을 "김포의 금강"이라 할만하다는 것을 족히 알 수 있다.
정상에서 가파른 길을 내려온다.
옆으로 일부 무너진 곳도 있지만, 성곽이 잘 남아있었다.
잔존 성체에 글자가보인다.
아마 책임논란을 위해 새겨놓은것 같다.
중봉 헬기장에 있는 안내도.
쉬워보이지만 ,나도 세번째 와서야 문수산성 윤곽을 알수있었다.
산성길 옆으로 성곽이다.
무너진곳도 있고, 남아있는 곳도 있다.
뒤돌아본 정상 문수봉.
잘 남아있는 부분.
무너진 부분.
무너져 있는 구간이 많았다.
이 언덕을 넘자..
깨꿋하게 복원된 성곽이 보인다.
바로 아래가 홍예문이다. 옛 지도에는 암문으로 표시되어있다.
문과 성곽의 이음매.
공사중이라 문 주위가 지저분하다.
홍예문은 지난 여름사진으로 대체한다. 바깥쪽이다.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이고...
여기부터 복원되어 깨끗한 성곽이다.
성곽위로 올랐다.
저 끝에서 복원이 끝난다.
내려서 보았다.
홍예문에서 이어지는 성곽.
복원이 안된구간.
복원이 안되있어서..옛스러움이 있다.
작은 언덕에서..
321봉이 잘 보인다.
바깥쪽은 성곽이 잘 남아있다.
이 봉을 넘자..
급경사로 내려간다.
성곽은 보수되어 이어진다.
바깥쪽으로 나와보면, 성곽위쪽이 보수되어있슴을 알수있다.
이곳도 글자가 새겨져있다.
내려온 성곽.
남문쪽으로 이어진 성곽.
성곽 위쪽이 깔끔하게 보수되어있다.
양호한 상태의 성곽이 이어진다.
뒤돌아 바라본 모습.
아래쪽에서 바라보았다.
무너진 곳도 있고..
무너진 곳이 없으면 성곽답사가 곤란하다..내려갈수가 없으니..
하얗게 복원된 위쪽성곽이다.
그나마 이정도여서 다행이지 싶다.
계속 이어진다.
저 언덕을 넘으니..
다시 아래로 이어지고...
암반위에 쌓은 성곽.
한국적 원(圓)을 그리며...
이곳은 아직 복원이 안된 모양이다.
여기도 글자가 새겨져있다.
이곳부터 아래방향으로 급경사를 이룬다.
지나온 성곽.
이곳부터도 성곽상태가 좋은데..복원한것 같지는 않다.
계속 아래로 이어진다.
간혹 배부름현상이 있는곳도 보인다. 곧 무너진단 얘기다.
옛모습 그대로다.
문수산성 전체중 상태가 가장 좋은것 같다. 그리고 북문쪽은 자연석을 이용한것에 비하여, 이곳 남문쪽은 화강암이다.
아래로 계속 이어진다.
잡목때문에 성곽위로 올라야한다.
군부대 철조망이다. 여기서 우회 햐여야한다.
물론 이부근은 성곽이 남아있지를 않다.
철조망을따라 군부대를 한바퀴 돌으니, 남문이다.
안쪽모습.
바깥쪽.
성곽은 군부대까지만 복원되어있다.
강화대교쪽에서 바라본 남문. 남문은 다시 북문으로 이어지는데 모두 유실되었다.
강화역사관에있는 그림만이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성곽이 유실된 구간으로 해안가에 위치하고있는데, 당시 프랑스 나폴레옹 3세군과 치열하게 전투하던 곳이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 공격에 실패하고나서,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수한다 .그때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銀金塊:당시 화폐로 환산하여 3만 8000달러)와 외규장각 도서 345권 등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난다.
현재는 도로로 바뀌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성곽이 있던 모습을 그리며 북문으로 걸어간다.
이렇게 문수산성 답사를 마친다.
문수산성은 복원계획이 나와있었다.
능선상에 남아있는 약 4Km를 전부 복원할예정이고, 안에 시설물까지 계획되어있는데..성곽을 어떻게 관리할것인지?
지금처럼 복원만 해 놓는다면 복원후 방치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성 바깥쪽에 길을 만들고, 성곽은 밟지 못하게 하여야한다.
무너진 곳에 길을 만들어 안팎으로 다닐수 있게하여, 등산로와 성곽로를 별도의 동선으로 계획한다면, 누가 성곽을 밝고 지나가겠는가?
관리란것은 불편을 초래해서는 안된다. 불편하기에 성곽을 밟고 다니는것이다.
성곽복원에 도로편성 예산도 같이 있어야한다. 그것이 진정한 복원계획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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