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
종 목 : 사적 제133호
명 칭 : 강화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터
수량/면적 : 7,534㎡
지 정 일 : 1964.06.10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
시 대 : 고려시대
소 유 자 : 국유,사유
관 리 자 : 강화군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강화유수부동헌
지정번호 : 25호
지정년월일: 당초-1972.5.4 변경-1995.3.1
관리자 : 강화군
소유자 : 강화군
규 모 : 1동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번지
이 건물은 강화 유수부의 동헌으로 오늘날의 군청과 같은 관아 건물이다.
조선 인조 16년(1638)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였으며, 영조 45년(1769)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글씨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인 백하 윤순(尹淳)의 글씨라 한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8칸, 측면3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1971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규장각 (外奎章閣)
1781년(정조 5) 3월에는 이곳 궁전 자리에 외규장각이 설립되었다. 강화유수 徐浩修가 왕명을 받아 행궁 동쪽, 장녕전 서쪽 사이에 있던 燕超軒을 헐고 건물을 새로 지어 강화부 內冊庫의 책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기고, 또 서울 궁성으로부터 의궤·옥책 등을 다수 옮겨왔다. 내책고는 효종 이래 강화부에 둔 책들의 보관을 위해 1753년 유수 申思가 객사 동쪽에 세웠던 것이다. 1778년(정조 2)에 反庫御史 沈念祖는 이곳의 軍器別貯置事를 감사하면서 내책고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직접 보고, "선대로부터 전해내려와 봉안하고 있는 璿籍, 어필, 어제, 金寶, 玉印, 竹冊, 敎命, 典章의 文字, 文簿가 너무 많아 가득 넘칠" 정도라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국왕은 이 보고를 받고 "봉안한 전장 문자가 많은 것이 史閣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외규장각이라고 할 만하다"고 하는 찬사 속에 외규장각 설립의 뜻을 확고하게 보였던 것이다. 외규장각은 이런 경위를 배경으로 1781년에 정식으로 발족되어, 1782년 2월에 건물 준공을 본 뒤 4월 2일을 길일로 잡아 직제학 심염조, 검교 직각 서정수가 배진관으로 봉안사와 찰리사의 직함을 받아 창덕궁 봉모당에 모셨던 물건과 대비전과 혜경궁과 정조의 책보를 옮기는 일을 맡았다. 어제·어필로 사고에 흩어져 있는 것도 모두 외규장각에 보관하게 하여, 어제·어필은 창덕궁 규장각과 이 외규장각 두 곳에만 봉안하도록 하였다
강화부종각
원래 고려궁터 종각에 걸려 있으면서 강화의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된 이 종은 조선 숙종 37년(1711)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그 후 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것으로 현 우리나라 보물 제1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 종은 매년 3.1절과 광복절, 제야 등 1년에 세 번 타종되었으며 한때는 통행금지를 알리는데 사용되기도 했었으나, 지난 95년 1월, 노후로 종의 훼손상태가 심각해져 타종이 금지되면서 영구보존을 위해 강화역사관 제2전시실에 보관되고 있다.
이 동종은 전통적인 한국 종의 형태에서 벗어나 옆띠를 몸체의 중앙에 돌려 몸체를 위 아래로 구분하여 놓았고, 어깨부분은 턱이져 있다. 그리고 어깨에서 훨씬 떨어져 꽃무늬로 장신한 독립된 4개의 유곽을 형성하고, 그 안에 연꽃으로 표현한 9개의 유두를 배치하였다. 특히 옆띠로 구분한 하반부에는 종구에 한가닥의 꽃무늬옆띠를 돌려 구연대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무늬띠와 가운데 옆띠 사이의 넓은 공간에는 장문의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이 명문에는 주종 관계와 개주 관계 등의 사실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침입한 프랑스군이 종을 약탈하여 가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다.
현재 강화부종각에 있는 종은 강화동종과 모양과 크기를 똑같이 주조해 새로 만들어 놓은 신강화동종이다. 총중량 3,912kg, 높이 198cm, 구경이 138cm에 달하는 강화동종은 조선시대 후기 동종으로는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강화유수부이방청
지정번호 : 26호
지정년월일: 당초-1972.5.4 변경-1995.3.1
관리자 : 강화군
소유자 : 대법원
규 모 : 1동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2번지
이 건물은 조선 중기에 강화 유수부내 육방(六房)중의 하나인 이방청으로 조선 효종 5년(1654) 유수 정세규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하던 것을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개수하고 괘홀당이란 당호를 게시하였다. 1945년 해방이후 지방법원(등기소) 사무실로 임시 사용한 적이 있으며, 1977년 강화 중요 국방 유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재위: 1213 ∼ 1259)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든 고려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로 천도하여 1234년에 궁궐과 관아 건물을 완성하였다. 1270년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 궁궐과 성은 무너졌다.
1637년 병자호란시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된 사실이 있으며, 그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 궁전건물(장령전, 행궁,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정, 세심재 등) 및 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 등은 소실되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다. 이곳은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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