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5호
명 칭 : 부여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983,598㎡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시 대 : 삼국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부여군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자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입구에 사비문이다.
사비문은 사적 제5호로 지정된 부소산성의 정문이다. 이 문은 1986년 11월 건립된 70㎡규모의 목조건물로 팔작(八作)지붕 3간 측면 2간의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다.
안쪽모습.
안내대로 따라가니 삼충사가 나온다.
삼충사(三忠祠)
문화재자료 제115호 (부여군)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흥수·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충신으로, 좌평으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 죽었다.
흥수는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다 대신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고 결국은 멸망하였다.
계백은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결사대 5,000여명을 뽑아 지금의 연산인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1957년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삼충사의 의열문이다.
그안에 다시 삼문 충의문이있고...
충의문안에 삼충사다.
성충,흥수,계백의 영정이 모셔져있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언못이다.
녹음이 우거진 길을 걷는다.
온통 단풍나무라, 가을에 대단할것 같다.
왼쪽으로 토담이있는데, 내성(內城)같다.
부소산성은 토성이라 성곽이 오솔길로 되어있다. 따라가 본다.
큰길과 만나는데 군창지부근이다.
다시 원래위치로 와서, 큰길을 따라오른다.
길옆에 다시 부소산성이다.
산성길로 접어든다.
자칫 오솔길로 착각하기쉬운 산성이다.
역시나 군창지부근에서 아까 내성과 만난다.
군창지(軍倉址) - 문화재자료 제109호 (부여군)
백제 때 군대에서 쓸 식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부소산 동쪽에 있는 부소산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군창지는 1915년 땅 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건물터의 규모를 자세히 밝혀냈다. 백제 때부터 자리잡은 이곳 군창지를 조선시대에도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에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군창지 옆에 영일루(迎日樓)다.
문화재자료 제101호 (부여군)
부여에 있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2층 내부모습.
다시 토성길을 밟는다.
성 보다는 후원길의 역할이 컸을것 같다.
이어서 수혈주거지다.
백제때의 움막으로, 땅을파고 그곳에서 생활을 하던곳이다.
산성길을 따라가니 반월루(半月樓)다.
1972년에 세워진 2층누각으로 백마강과 부여시가지가 한눈에보인다.
궁녀사 가는길이다.
이어서 궁녀사(宮女祠)다.
삼천궁녀의 영정을 모신 사당. 매년 10월 백제문화제시 그들의 절개를 기리기 위한 삼천궁녀 추모제가 거행된다.
저런나무로도 아름다운을 추구하는... 한국의 미다.
솟을대문이있고...
그 안에 궁녀사가있다.
다만 영정의 모습이 기대와 달랐다.
다시 길을따라간다.
사자루다. 사비루와 사자루는 같이 불리운단다.
문화재자료 제99호 (부여군)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비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비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사비루는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이름을 새긴 백제시대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어 더욱 주목받는 장소이다.
이윽고 낙화암길이다.
낙화암에 이르니 백화정(百花亭) 이다.
문화재자료 제108호 (부여군)
부소산성(扶蘇山城)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평면을 6각형으로 지은 정자(亭子)이다. 백제 멸망 당시 궁녀들이 이곳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의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뛰우고 남쪽에 나무 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평난간을 설치해 두었다.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꽃 문양(紋樣)을 그려 놓았다. 정자에 올라서서 보면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백마강이다.
낙화암.
강 건너에는 백제역사재현단지가 조성중이다.
가까이 가서보니 어마어마했다. 1994년부터 시작해서 2010년 완공이란다.
경복궁보다 으리으리한것같으니, 빨리 완성되기를 바란다.
다시 길을따라 내려선다.
충녕사다.
다만 6.25와 베트남전쟁등 나라를 위해 싸우자 전사한 전몰군경 927의 위패가 모셔져있다고하니..부소산성이나 백제의 역사와는 전혀무관한 건물이 되겠다.
다시 짙은 녹음을 따라 내려선다.
사비문 도착으로 부소산성 답사를 마친다.
모든 토성(土城)이 그렇지만, 부소산성 아담한 오솔길이다.
자칫 산성이 산책이나 조깅을 위한 코스역할만 되지않도록...관계당국에 관리를 잘 부탁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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