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478호
명 칭 : 화성행궁(華城行宮)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37,268㎡
지 정 일 : 2007.06.08
소 재 지 :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 수원시(수원시장)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풍루(新豊樓)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무예 24기 시범이 있었다.
무예24기는 정조의 명을 받은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무예의 달인 백동수가 1790년에 편찬한 『무예도보통지』 의 24가지 무예를 말한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 전래의 무예는 물론,중국과 일본의 우수한 무예를 적극 수용하여 '24기(技)'로 정리한 무예교범서로서 부국강병의실학정신이 담겨 있다.
무예 24기는 화성에 주둔했던 당대 조선의 최정예부대 장용영 외영 군사들이 익혔던 무예로서 역사적 가치는 물론 예술적, 체육적 가치가 아주높은 무형의문화유산이다.
이곳 화성행궁의 북군영과 남군영에 주둔한 군사들 또한 24반무예를 수련하여 행궁호위에 최선을 다했다.
무예를 보면서 느낀점은, 조선무예와 우리전통 춤이 너무도 비슷하다는 점이다.
결국 무예나 춤은, 그민족의 혼과 정신이 변화한모습 아닐런지...
신풍루를 안쪽에서 본 모습.
좌익문이다.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그 옆에는 수원화성을 쌓을때 사용한 거중기가 있었다.
좌익문을 들어서니 중양문이다.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중양문을 들어서니 봉수당이다.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
특이한점은 삼도길이 건물중앙에 위치하지 않는다는점이다.
봉수당내부로 어전이다.
우측엔 왕이 집무하고, 왼쪽엔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있다.
혜경궁 홍씨뒤쪽으로 장락당이 보인다.
왕이있는곳은 지붕도 다르다.
경룡관을 통해 장락당으로 들어갈수있다.
경룡관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 왔다.
정조는 당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794년(정조 18)에 세워진 경룡관을 2층 구조로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경룡관 2층내부
봉수당에서 바라본 중양문.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 라고 하였다.
장락당 옆은 복내당이다.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장락당과 복내당등은 무척 바쁜곳 같았다.
문도 많고 행각도 많아, 어디가 어딘지 방문자도 헷갈릴 정도다.
그 앞쪽으로는 유여택이다.중양문 옆에서 들어갈수도 있다.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마치 정자를 보는듯한 공신루.
행각이 2층으로 되어있는점이 흥미롭다.
유여택앞의 넓은 뜰. 봉수당만큼 크다.
봉수당 뒤편이다. 굴뚝이있고, 시중을 드는사람이 기거하는 장소이다.
득중전
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한 것이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득중전과 낙남헌
낙남헌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중 하나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년(정조 18)에 관공되었다.
1795년(정조 19)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 하였다.
낙남헌 뒤쪽으로는,노래당이 있다.
노래당
노래당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수원에서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이다.
다시 궁안으로 들어간다.
행각으로 둘러싸인 행궁밖의 모습이다.
벽면에는 정조대왕 행차그림이 길에 그려져있다.
집사청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죄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저 있다.
그 다음 문으로 들어가면 북군영이다.
북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 하였다.
집사청앞의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
외정리소
정리소는 장차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정조 20)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 하였다.
비장청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서리청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칸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외정리소,비장청, 서리청은 좌익문을 바라보며 집사청 맞은편에 자리잡고있다.
남군영도 신풍루를 중심으로 북군영 반대편에있다.
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 하였다.
화성행궁은 팔달산 기슭, 성내 중심부를 이루는 평지에 동향(東向)을 하고 앉아서 신풍루·좌익문·중앙문·봉수당 등의 건물이 중앙의 동서방향의 중심축을 이루고, 그 좌우로 여러건물들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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