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 (종로구)
명 칭 : 홍지문및탕춘대성(弘智門및蕩春大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76.06.23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홍지동 산4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종로구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문화진흥과 02-731-1170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 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우진각 지붕이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 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왜란과 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였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년(1702)에 신완(申琬)이 제의하였다. 그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였음도 알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탕춘대성은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또는 축성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 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성의 축조와 마찬가지로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홍지문이다.
오수간문과 홍지문.
오수간문.
안쪽에서 바라본 홍지문과 오수간문.
홍지문과 성곽의 옛모습이다.
오수간문 끝쪽부터 산성시작이다.
다만 아쉽게도 아곳에서 오를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상명대에서올라 거꾸로 이곳까지 내려왔다.
탕춘대 성곽이다.
거꾸로 오니, 홍지문에서 올라온 성곽을 다시만났다.
여장이 깨끗하게 복원되어 있었으나, 부자연스럽다.
길 반대편에는 인왕산에서 이어져온 성곽이 홍지문으로 내려오고있었다.
아쉽게도 이 성곽도 답사할수 없었다.
깨끗하게 복원된 성곽모습이다.
그러다 이내 원상태의 성곽을 만날수 있었다.
이것이 탕춘대성곽의 본래 모습이다.
숙종때의 성곽모습이다. 제발 복원하지 말기를...
탕춘대성의 특징은 사람키 정도의 성곽이 약 4km를 이어져있다는것이다.
더 높은곳도 고,, 더 낮은곳도 없이 그정도높이를 유지하고있었다.
성곽 안쪽에는 호젓한 오솔길이 나있었다.
여장은 모두 없어졌다.
옆의 나무를 보니, 이정도로 성곽이 남아있는것이 신기하다. 나무가 자라면서 성곽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북한산성이나, 서울성곽에 비하면 성곽돌이 작은 편이다.
극히 일부분에서만 여장이 남아있었다.
아주 양호하게 성곽이 이어져 간다.
약 300년을 유지하고 있는셈이다.
가끔보여지는 큰돌을 , 어떻게 이곳까지 올렸는지 궁금했다.
한곳도 무너지지않고 이어져온다.
홍지문에서 올라온곳일부가 무너졌지만, 그 이후론 상태가 매우 좋았다.
치성으로 보이는곳도 있다.
성곽이 상명대 뒷담장 역할을 한다.
성곽과 오솔길이 너무도 멋지다.
오다가 보니 성곽돌이 커져있는것을 발견했다.
성곽밖의 홍제동 모습이다.
멀리 북한산이고...
성곽이 훌륭하게 이어져간다.
뒤를보니 인왕산과 안산모습이 보였다.
돌 크기나 상태가, 서울성곽과 같은 모습이다.
다만 높이가 낮았다.
탕춘대성의 유일한 암문인 독박골암문이다.
문을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밖에서 본 암문모습.
다시 성곽이 매끈하게 이어져간다.
옆으론 서울시내가 빤히 내다보인다.
신록속에 성곽의 모습이 간신히 유지된다.
성곽안쪽으로는 소나무와 길이 너무도 멋지다.
이 소나무가 자라면서, 성곽을 무너뜨리지 않은게 고마울정도다.
여장이 남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향로봉이다.
성곽이 향로봉근처까지 이어져있었다.
이제 성곽도 마지막이다.
앞에보이는 자연암반까지 성곽이 이어져있다.
성곽이 끝나는암반위에 올라섰다.
향로봉이 손에 잡힐듯이 있고...
뒤를 돌아보니 연두색 신록속에 지나온 성곽능선이 보인다.
탕춘대 능선길이다.
더 올라가보니 성곽돌이 아니다. 성곽은 전에 끝나있었다.
다시 돌아간다.
이번에는 성곽안쪽길로 가본다.
성곽과 등산로다.
탕춘대능선은 너무도 길이 좋다.
다시한번 성곽위로 올라서본다.
이북오도청 위로 북한산 비봉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악산 성곽이 실처럼 보인다.
탕춘대성은 매우 보존상태가 좋았다.
비록 여장은 거의다 무너졌으나, 성곽자체는 무사했다.
서울시가 2009년부터 복원사업을 한다는데, 어찌하려는지..다 부수고 새로 만드는것은 아닌지...
신문에서보면 인왕산에서 홍지문을거쳐 현재의 길을 갈수있게 한다는데, 복원을 빌미로 파괴나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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