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강화 삼랑성 (三郞城)

메탈 2008. 4. 20. 10:47

종    목 : 사적  제130호 
명    칭 : 삼랑성(三郞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245,997㎡ 
지 정 일 : 1964.06.10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 
시    대 : 삼국시대
소 유 자 : 국유,사유
관 리 자 : 강화군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檀君)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三郞城) 이라 부른다. 혹은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의 축성 구조를 보면 잡석(雜石)으로 축조되어 삼국시대 석성구조(石城構造)를 보여 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補修), 조선시대에 중수(重修)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宗海樓)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기념비로서 양헌수 승전비(梁憲洙勝戰碑)가 서 있다. 이러한 삼랑성은 특히 마니산 전설과 더불어 단군신화와 관련되는 흥미있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주차장앞이 동문이다.

여닫이문이있던 흔적이 있었고, 여태 보아왔던 문과는 좀다른 독특한형태이다.

 

성 바깥쪽 성곽.

 

 

문 안쪽모습이다.

 

문 바로 안에는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기념비로서 양헌수 승전비(梁憲洙勝戰碑)가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성곽을 따라가본다. 동문에서 북문방향이다.

 

여장까지 잘 복원되어 있었다. 약 2m 간격으로 총안이 있다.

 

이 곡선이야말로 한국적 아닌가?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런 산성곡선이 없다.

 

뒤돌아보니 남문 종해루(宗海樓)지붕이 보인다.

 

이 언덕끝까지 여장이 있다.

 

언덕을 올라오니, 성곽끝에 치성의 흔적이 보이며 방향이 90도 꺾인다.

 

내려가보니 치성이 맞다.

 

자연석으로 된 성곽이다.

 

그래서인지 오랜 세월속에 자체무게때문에 깨진흔적이 많았다.

 

다시올라오니 편안한 길로 산성길이 이어진다.

 

성곽위로 길이 잘 나있었다. 간혹 여장의 흔적도 보인다.

 

삼랑성에는 성곽이 사진처럼 튀어나온곳이 한군데 있었는데, 이유를 알수가 없다.

왜 저곳만 튀어나와 있을까 ????

시공업체가 반대편에서 서로 쌓오다가 잘못 만난것은 아닐테고....

 

이렇듯 깨끗한곳은 복원된 부분이다.

 

뒤돌아본 성곽모습으로,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산성 밑으로 길을 내서, 산책도 할수있고 산성도 볼수있게끔 해야� 산성의 가치를 더 살릴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지금처럼 산성위로만 다닐수 있게 하는것은, 등산로 다진것이외에  무슨가치가 더 있을까?

 

삼랑산 정상까지 산성이 뻗어있다.

 

깨끗이 복원된 구간도 있도...

 

옛모습 그대로인 구간도 있어서, 나름대로 이질감없이 조화가 잘되어 있었다.

 

북문이 보인다.

 

문 안쪽모습이다.

 

문 밖의 모습으로 매우작은 암문형식이다.

 

그래서인지,문을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지나온 성 바깥쪽 모습.

 

정상쪽의 성곽이다. 깨끗한것을보니 복원된것 같았다.

 

다시 성곽위로 올라와 정상을 향한다.

 

뒤돌아 본 모습이다. 

 

여기부터는 복원안된곳이다.

 

정상에서 보니, 지나온 성곽길이 한눈에 보인다.

 

삼랑산 정상이다.

 

 

방향이 90도 꺾이며, 앞의 언덕으로 성곽이 연결된다. 저 언덕밑에 서문이 있다.

 

정상에서 밑으로 내려가니, 꺾인부분이 옹성형태를 보인다.

 

허물어진곳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양호한 곳이 많았다.

 

 

 

 

길이 좋아지며 서문이 보인다.

 

 

서문 안쪽모습으로, 동문처럼 컸다.

 

그리고 문이 있었다.

 

서문 바깥쪽 모습이다.

 

서문쪽성곽은 상태가 아주 좋았다.

다만 복원한것이지 아닌지 알수가 없었다.

 

 

 

 

문의 상태를 보건대, 문은 옛 그대로인것 같다.

 

성곽이 다시 언덕으로 올라간다.

 

성곽과 여장으로 쓰였던 돌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강하게 나타난다.

 

전등사가 계곡아래에 놓여있다.

  

그리고 반대편 능선위에는 지나온 산성성곽이 보이고...

 

동문에서 오른 산성길이다.

 

잠시 무너진 틈으로 내려가 보았다.

 

이곳도 성곽상태가 좋았다.

 

다시 위로올라와 길로 들어섰다.

 

다시 방향이 꺾인다.

그런곳엔 옹성이나 치성이 있기마련, 내려가 보았다.

 

오랜세월을 지났지만,성곽이 훌륭하다.

 

역시 옹성형태다.

 

성곽이꺾여 남문으로 향하고있다.

 

이건 분명히 여장흔적이겠지?

 

남문 가까이오자 여장이있는 복원된 성곽이다.

 

성곽의 실루엣이다.

오른쪽은 남문으로 이어지고, 뒤쪽은 동문에서 올랐던 길이다.

 

여기 성곽은 동문것과는 좀 달랐다.

 

소나무숲과 성곽이 잘 어울린다.

 

왜 같은 성인데 동문성곽과 남문성곽이 다를까???

시공업체가 달라서일까?

아니면 고려시대에 보수(補修), 조선시대에 중수(重修)가 각기 달랐을까?

 

성곽이 남문으로 내려간다.

 

남문 종해루(宗海樓)다.

 

누각위에서 사람들 말소리가 나길래 들여다 보았다.

 

이게 뭐람?

물어보니 다도회(茶道會) 동호회에서 사용중이란다.

삼랑성 문루가 다도회 동호회모임방.

이것이 우리 문화재 보호의 현주소다. 남대문 불난것갖고 온통 난리떨지만, 이것과 무었이 다르지?

 

어처구니없는 삼랑성 남문 종해루(宗海樓)안쪽 모습이다.

 

종해루 밖의모습.

글자가 한글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져있다는것이 특이하다 할수있다.

 

성곽이 동문으로 향한다.

 

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전등사(傳燈寺)다.

창건 :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아도화상이란 중이 창건
당시 절이름 : 진종사

전등사로 개명 : 고려  충렬왕때 진란에 부서졌던 진종사를 복원하고 복원 재앙시에 충렬왕비(정화공주)가 옥으로된 등을 하사 하시어 "전등사"라고 개명.

정족산 : 전등사가  위치한 산으로 솥을 걸수있는 모형의 뽀족한 봉우리가  세개 있는산.

전설(여인의 나상) : 대웅전   중수시 도목수 동량이란 사람이 온수리 시장 주막집 여자를 좋아하여 후일 혼인을 약속하고 품삯을 전부 맡겼는데 어느날 여자가 도망을 갔다
이에 격분하여 저주받을 여자라고 단정하고 그여인의 발가벗은  모양을 조각하여  무거운  네 추녀를  영원히 바치고 저주를 받도록 하였다는 전설이 있음.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동문쪽으로 올라간다.

 

남문의 보존을 위하여....

 

 

여기서 방향이 180도 꺾인다. 아쉽게도 밖에서 이곳모습은 가팔라 볼수 없었다.

 

이 삼랑성의 개략도이다.

현재위치가 10번이다.

 

동문으로 향하며 바라본 남문쪽 성곽이다.

 

이윽고 바로 동문이다.

 

동문을 나서며, 삼랑성 답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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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성은 보존상태도 좋고, 복원된곳도 깔끔했으며,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곳이다.

다만 전등사의 입김에 센모양인지, 곳곳에 삼랑성이 전등사를 위한것처럼 보여지는 부분이 많았다.

 

남문위의 다도회도 그렇고, 안내팜프렛도 전등사 사무실에가야만 받을수있고...

산성입장료가 전등사 입장료였다.

속세를 떠났다고하지만, 입장료는 아닌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