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돈대에서 조금 아래 석각돈대가 있다는데 찾을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물어물어 가본다.
석각돈대(石角墩臺)
석모도와 황청리 선착장을 연결하는 다리가 공사중이다.
그 연장선상에 석각돈대가 있다.
약 300m쯤 오르니 석각돈대다. 거의 파괴되어 있었다.
훼손된 돌들을 모아놓은것 같았다.
바깥쪽은 거의 무너진 상태.
절에서 사용한 석재인 모양이다.
이 돌들도 돈대꺼겠지...
겨우 남아있는 모습
삼암돈대는 석간돈대 바로 근처라 들러보았다.
삼암돈대 항공사진
건평돈대(乾坪墩臺)
종 목 : 시도기념물 제38호 (강화군)
명 칭 : 건평돈대(乾坪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99.03.29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산39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산림청)
관 리 자 : 강화군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지난번 어렵게 찾은 돈대라 상태가 궁금하여 다시 찾았다.
지난번에 잡초가 무성했으나 이번엔 좀 깔끔하다. 하지만 복원은 안된상태.
양지촌에 차를 주차시키고 가운데길로 500m쯤 가야한다.
다행히 길에 뜨문뜨문 리본이있어 초행자도 찾기 쉽다.
전망좋은 건평돈대.
입구는 무너져있었다.
포구가 전방으로 4개다.
안쪽은 많이 허물어진 상태
포구도 무너진곳이 있다.
무너진곳으로 밖으로 나왔다.
바깥쪽은 의외로 상태가 괜찮다.
예술작품같은 포구
무너지려하는곳도 있지만 상태는 양호했다.
건평돈대 항공사진
굴암돈대 (屈岩墩臺)
종 목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9호
명 칭 : 굴암돈대 (屈岩墩臺)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정(등록)일 : 1999.03.29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98번지
시 대 : 조선시대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예술과 032-930-3627
이곳도 지난번 답사때 놓친곳
재미있는것은 강화도 돈대의 형태가 원형이거나 사각형 둘중의 하나인데, 굴암돈대는 앞쪽은 원형 뒤쪽은 사각형의 형태다.
뒤쪽은 직각
앞쪽은 원형이다.
먼저 입구를통해 안으로 들어가본다.
분오리돈대와더불어 독특한 모습이다.
계단일지?
배구수와 옆의돌은 예비인지?
배수구
굴암돈대 항공사진
이상 돈대답사를 마친다.
답사하면서 궁금한게 많은데, 특히 돈대의 이름이 중복으로 쓰이기때문에 오는 혼란함이다.
택지돈대와 후애돈대는 명칭정리가 필요하다. 어느자료에서는 같은돈대, 어디는 별개돈대로 혼동되어 사용되고, 급기야는 서로 반대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송강돈대, 선수돈대, 검암돈대도 아직 알수가없다. 세개가 같은돈대인지 별개돈대인지....그외 두개이상 명칭을 가진 돈대가 많아 혼돈스럽다.
북쪽의 돈대는 군부대가주둔해있어 갈수가 없었다.
구등곶돈대는 군부대 철수하면 가보면되고, 북장곶,의두,철북,천진,승천보,숙룡돈대는 군사통제지역이라 아직 아무도 가본사람이 없다.
현재 민통선안의 돈대중 광암돈대와 소래돈대(초루돈대)만 답사하였다.
2개의 관광지도 누르면 확대됨
보너스 초지진
초지진(草芝鎭)
시대 : 조선
성격 : 국방유적, 고지명
유형 : 유적
지정 (지정일) : 사적 제225호 (1971년 12월 28일)
건립시기 :1716년(숙종 42)
소재지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분야 :역사/근대사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강화부지(江華府志)』에 따르면 1716년에 설치되었으며, 1726년(영조 2)에 진장(鎭將)으로 종4품 무관인 병마만호(兵馬萬戶)가 배치되었다. 1763년에는 진장을 종3품 무관인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군관(軍官) 11인, 사병 98인, 돈군(墩軍) 18인, 목자(牧子) 210인을 배치했고, 진선(鎭船) 3척을 두었다. 초지돈(草芝墩)·장자평돈(長者坪墩)·섬암돈(蟾巖墩)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대는 9개가 있었다.
1871년(고종 8) 4월 23일 미국 해병 450명이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초지진 수비대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 결국 미군에 점령당했다. 이 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화약고·진사(鎭舍) 등 군사 시설물은 미군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다.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 문의 대포 역시 그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강화해협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그 뒤 1875년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동남방인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 단정(短艇)을 내려 담수(淡水)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여 왔다. 이에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자, 운요호는 110㎜와 40㎜ 함포로 포격을 해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 때 초지진에는 사정거리 700m의 2인치 정도의 대완구만 있었다.
그 뒤 초지진은 폐쇄되어, 시설은 모두 허물어지고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 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砲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다. 그 외 조선시대 대포 1문이 포각(砲閣) 안에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성채와 돈 옆의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미국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상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 - 백과사전
초지진 항공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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