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성 내에 계층별 주거양식을 재현한 것으로 당시의 생활모습을 보여준다.
백제시대에는 왕 아래 16관등으로 구분해 관직을 두었는데 이곳에서는 크게 4개 계층(귀족, 군관, 중인, 서민)으로 구분돼 배치됐다.
군관주택은 당시 최고의 무장이었던 계백장군의 가옥으로 연출해 군사와 관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귀족주택은 사택지적의 저택으로 문관의 생활모습을 연출했다.
중류주택에는 백제의 전문교육을 담당하는 관직이며 일본에 백제문화를 전파한 박사계급으로 유교경전을 교육하는 오경(五經)박사와
단양과 전문교육을 담당하는 와(瓦)박사 마노부노, 악사(樂師) 미마지, 의(醫)박사 왕유능타 등의 가옥을 재현했다.
서민계층의 주거로는 불상조각가 도리, 주조 인번, 금속세공 다리, 대장장이 탁소, 도공 신한고귀 등
설화나 문헌에 등장하는 백제시대 인물들을 통해 당시의 수공업을 보여주며,백제시대 대표적 설화 등을 영상으로 연출해 백제시대의 계층별 주거모습은 물론 생활문화 등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 안내문에서
백제문화단지에는 이와같이 큰 문루가 몇개있다
차도에있는 백제문을 비롯하여, 여기 홍제문 그리고 몇백미터 왼쪽에 위례문
아마 단지를 둘러싸고 사비성을 만들계획인지는 모르겠으나, 비용도 많이들고 완성도도 높은것으로 보아, 차후 입구로 쓰일것은 분명했다
현재는 홍제문은 열어놨으나, 위례문은 닫아놓은 상태다
성곽은 입구양쪽에 조금 있는 상태다
성곽안쪽
성곽끝은 나무목책으로 되어있었다
이제 백제마을로 가보자
먼저 군관주택이다
계백장군댁(군관주택)
백제 말기의 대표적 무관인 계백장군의 집을 재현한 곳이다. 서기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해오자 계백은 자신의 처자를 베고,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 명을 맞이하여 다섯 번의 전투에서 네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충절과 기상은 후대에도 널리 전해지고 있다.
대문과 행랑채
부옥앞에 객실로 통하는 협문이다
부옥인 선인재
그 뒤로 주옥인 숭의당
협문을 통해 객실로 가본다
마굿간
여러채의 객실
여기서 사병(私兵)을 거느린것 같다
우물도 보이고...
여기선 무기를 만들었다
여기는 무기나 식량창고 같았고...
군관주택(계백장군 집)이었다
다음은 사택지적댁(귀족주택)
백제 귀족의 주택으로, 백제 말기에 대좌평을 역임하였던 사택지적의 가옥을 재현한 곳이다. 대좌평은 제1의 관등인 좌평 중 최고에 해당하여 여덟 개의 큰 귀족 가문 가운데에서도 사(택)씨가 최고였다. 최근 발견된 미륵사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무왕의 왕비도 사택씨였음이 밝혀졌다.
대문이다
대문안쪽에 중문이 보이고...
중문
우측에 우물과 행랑체, 동중문이 보인다
왼쪽에 마굿간
서중문과 중문
중문으로 들어가보자
부옥인 회우재
죄측의 협문
그뒤에 주옥인 홍의당
홍의당 좌우로 협문이있고...
협문을 지나자 객실이다
객실내부
그리고 행랑채
동중문입구로 되돌아나왔다
이번엔 서중문으로 가보자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안주인실, 좌측이 노비실
노비실에는 연장이 가득했다
부엌
화장실
다음은 중류가옥
금속기술자 다리의 집
금속기술자 다리의 집을 재현한 곳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은제팔찌 안쪽에는 520년 다리라는 인물이 왕비를 위하여 팔찌를 제작하였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다리와 같이 우수한 백제의 금속공예 기술자들이 금동대향로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과 같은 빼어난 금속공예품을 제작하였다.
창고와 화장실인데...왜 화장실은 돌로 했을까?
중류와 서민가옥은 여러채가 있다
우물
돌과 나무로된 우물이있었다
다음은 서민가옥
직조 기술자, 서소의 집
5세기를 전후한 시기 일본에 파견되어 직조기술을 전한 서소의 집을 재현한 곳이다. 『고사기(古事記)』에는 응신천황 때 건너온 서소가 직조기술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당시 백제가 다양한 직물과 우수한 직조기술을 보유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여기도 화장실은 돌이다
생활문화마을은 가옥이 여러채가 있는데, 용인에있는 조선시대 민속촌과 좋은 대비가 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