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우리나라 중 왕궁의 모습을 최초로 재현한 백제의 사비궁(泗批宮 )
'검이불루요,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 백제시조 온조왕께서 새로 궁궐을 지으면서 하셨다는 이 말씀이 떠올랐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중 백제본기에 나온다는...'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그러나 부여에 재현된 사비궁은 상당히 화려하고 은은하면서 찬란해 보였다. 천정문을 중심으로 긴 회랑이 둘러 싸고, 14개동 4,492 평방미터다.
현재 우리가 볼수있는 궁궐은 조선시대의 궁궐이 전부다.
간혹 사찰에서 고려시대의 건축물을 볼수는 있지만, 일반건물이나 궁궐은 남아있는것이 거의 없지싶다.
부여에 백제문화단지가 개장되었다는것에 기쁨을 느끼는것중에 하나가, 고려이전의 건축물과 문화를 맛볼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재현된것이지만, 백제라면 1000년 이상된것 아니겠는가? 성곽은 백제때것이 많이 남아있지만, 그외의 건축물은 거의 남아있지를 않는것이 현실이다.
고속도로를 나와 국도를 가다보면 백제문화단지 들어가는 입구에 백제문이다
사비궁의 정문에 해당되는 정양문
정양문의 현판은 오욱진선생의 글이라고 한다.
이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 15분이 22개의 사비궁과 능사에 걸린 현판을 나누어 썼다고 했다.
정양문 앞의 판넬이 눈에 거슬렸다
정양문을 들어서면 사비궁이다
사비궁과 근처 안내도
사비궁의 정문인 천정문
사비궁 뒷동산에있는 제향루
오른쪽에는 능사 5층목탑이 보이고...
천정문은 조선시대의 정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정문은 행사때문에 통제를 하여, 서궁의 정문인 선광문으로 향한다
선광문안쪽으로 인덕전이 보인다
서궁은 정전과 외전으로 구성되었다. 정전인 무덕전(武德殿)은 서궁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로 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주로 무관(武官)에 관한 집무공간으로서 무덕전의 무(武)는 서쪽을 의미한다. 외전은 인덕전(麟德殿)으로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영물(靈物)인 기린(麒麟)의 덕을 의미한다.
인덕전(麟德殿)이다
좌우를 돌려있는 회랑은 조선시대와 거의 같았다
인덕전과 무덕전
인덕전 내부
무덕전이 보이고...
무덕전
무덕전 내부는 텅 비어있어 쓸쓸했다
방어를 위해서인지 덧문이 있었다
무덕전 뒤 통천문. 이리로 나가면 사비궁 밖이다
이제 중궁인 천정전이다
중궁전
백제 사비시기의 중궁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정전인 천정전(天政殿)은 국가의 큰 정사를 하늘에 고하여 결정했다는 천정대(天政臺)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곳 중궁의 정전은 왕의 즉위 의례, 신년 행사 등 각종 국가 의식이 거행되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왕궁 내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마침 행사가 진행중이다
천정문
행사가 끝난 청정전과 천정문
회랑은 조선시대의것과 거의 같았다
천정전 정면
천정문
천정전안의 어좌
왕비의 평상복
왕과 왕비의 대례복
천정전의 회랑
이제 동궁이다. 영연정의 모습
회랑은 마찬가지
이 그림은 고증에 충실한지?...
동궁의 정문 현정문이다
현정문에서 바라본 천정문
현정문에서 연정전으로...
내부에는 탁자가 있었다
가재도구도 보이고...
문사전
어좌에서 영상물이 나온다
그뒤 숭지문으로 나가면 바깥이다
서궁에서 바라본 천정문
중앙광장에서 바라본 천정문
정양문
천정문과 제향루
제향루
비록 재현된것이지만 백제의 사비궁이란것이 이런것이구나를 느낄수 있었다
조선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것이, 이때부터 이미 중국의 건축양식과 차별화 되어있다는것인가?
백제 초기의 위례궁과 좋은 비교가 될수 있었다. 한성시대의 위례궁과 사비시대의 사비궁이 이처럼 차이가 큰것은 국가의 위상과도 관련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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