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종로구(鐘路區) 세종로(世宗路)에 있는 경복궁(景福宮)의 정문. 조선시대 궁궐의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추고 있다. 육축은 세 곳에 무지개문을 내어 3문 형식을 취하며, 가운데 칸은 높이 17척 5촌, 나비 18척이고, 양옆은 높이 16척, 나비 14척 5촌씩이다. 문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우진각지붕을 얹은 중층건물이다. 포작(包作)은 안 7포·밖 5포이며,
1층 기둥 높이는 7척이고 기둥 간격은 앞면은 가운데가 27척, 양옆이 25척씩, 옆면은 10척씩이다. 1층 기둥 사이는 개방하였고 2층은 판문을 달아 열고 닫게 하였다. 내부 살미는 운궁(雲宮)을 사용하였고 내목도리(內目道里) 아래에 장화반(長花盤)을 놓았으며 공포 사이에는 포벽을 마련하였다. 가구수법은 아래층 대들보가 고주(高柱)에서 합보형식을 취하고 대들보와 위층 마루 사이에는 공간을 두었다. 아래위층 처마는 모두 겹처마이고 지붕의 각 마루에는 취두·용두·잡상들을 배치하였다. 1399년(태조 4)에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 무렵에 복원하였다. 1927년 일본의 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는네, 6·25 때 폭격으로 불타버렸다. 그리고 1968년 석축 일부를 수리하고 문루를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중건했다.- 백과사전
2010년 8월 15일 드디어 광화문이 복원 되었다
초기의 광화문
해치상의 위치과 지금과 달랐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앞의 광화문
6,25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한동안 광화문이 없던적도 있었다
1968년이 되어서야 복원된 광화문, 하지만 문루가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광화문이었다
그것도 방향이 틀어진 광화문. 경복궁의 정문으로 손색이 많았던 광화문이었다
광화문에서 보이는 경복궁. 위치도 제 위치를 잡았다
서울성곽이 인왕산구간이 바로 옆에 보이고...
비로소 경복궁의 정문으로 자리를 잡는다
광화문 좌우에는 커다란 해태상이 한쌍 서 있다.
해태(海陀)는 동아시아 고대 전설 속의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로, 원래 해치(獬豸)가 원말이다.
사자와 비슷하나 기린처럼 머리에 뿔이 있다고 정의되어 있는 ‘해치’는 그 형태적 특징이 목에 방울을 달고 있으며, 몸 전체는 비늘로 덮여 있다고 알려졌다.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여겨져, 경복궁 앞에 한 쌍의 해치상이 자리 잡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비추어 볼 때, 서울은 나라의 수도로 더없이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딱 한 가지 불에 약하다는 약점이 있다고 한다. 특히나 관악산이 유달리 불의 기운이 강한 산인데, 경복궁 뒤의 북악산이 관악산보다 낮아서 그 기운을 막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경복궁 앞에 두 개의 해치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해치는 2008년 5월 13일 서울시에 의해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선정되었다.
광화문 안쪽으로 들어왔다
광화문 안쪽
광화문 뒤에는 수문장청이 두채 있었다.
광화문 안에서 밖으로...
마침 새로복원된 용성문에서 수문장 교대식 행사가 이루어졌다
수문장 교대
광화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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