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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德壽宮) 야경

메탈 2010. 2. 8. 15:31

종    목 : 사적  제124호 
명    칭 : 덕수궁(德壽宮)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63,190㎡ 
지 정 일 : 1963.01.18 
소 재 지 : 서울 중구  정동 5-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재청)

 

대한문(大漢門)

외부에서 바라본 대한문(大漢門)은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4년 화재로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동향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잦은 도로 확장 등으로 위치가 수 차례 옮겨졌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 대한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이다.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을 별도로 노출시켜 놓았다.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지며,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 영어 등의 외국어로 교대의식에 대한 설명방송이 진행된다.

 

금천교 

인공으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놓은 돌다리이다. 2개의 나란한 홍예교로 되어 있다.

 

길을따라가면 중화문이다.

 

덕수궁의 안내도는 다음과같다.

 

함녕전의 기와지붕이 저녁실루엣으로 다가온다.

 

덕수궁의중화전및중화문(德壽宮의中和殿및中和門) 

종    목 : 보물  제819호 
명    칭 : 덕수궁의중화전및중화문(德壽宮의中和殿및中和門)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일곽 
지 정 일 : 1985.01.08 
소 재 지 : 서울 중구  정동 5-1 궁중유물전시관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덕수궁

 

중화전은 덕수궁의 중심 건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광무 6년(1902)에 지었으나 1904년 불에 타 버려 지금 있는 건물은 1906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중화전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밖으로 뻗쳐 나온 공포 부재의 형태가 가늘고 약해 보이며 곡선이 큰데 이것은 조선 후기 수법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안쪽에는 임금님이 앉는 자리를 더욱 위엄있게 꾸미기 위해 화려한 닫집을 달아 놓았다.

 

중화문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공포 양식은 중화전과 같이 조선 후기 수법을 가진 다포 양식을 따르고 있다. 원래 좌우로 복도건물(행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문 동쪽에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궁궐 건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중화문 

중화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중화전(中和殿)

양편으로 품계석이 늘어서 있다.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이다. 보물 819호로 지정되었고, 중화전이 세워진 월대는 상·하월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월대는 3단으로 되어 있다.

 

1902년에 처음 세워졌을 때는 본래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1906년에 다시 지었다.

투각곡병과 일월오악그림 병풍 앞에 어좌가 놓이고, 돌마당에는 문무백관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중화전에서바라본 중화문

 

뒤에서 바라본 중화전

 

석어당(昔御堂)

석어당은 궁전에 지어진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2층집이다. 1904년(광무 8년) 화재 후 같은 해 중건되었으나, 원래의 건물은 석어당은 선조 26년(1593년) 창건되었고,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며 선조(宣祖)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석어당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우진각지붕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 끝의 칸에 설치되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사방에 창을 내었다. 궁내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고 검소하며 소박하여 친근감을 준다.

 

 

함녕전(咸寧殿)

함녕전은 광무 1년(1897년)에 지어진 목조건물이다. 대형 건물로,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으로 결구된 간결한 건물이다.

고종(高宗)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다.

함녕전 남쪽으로는 행각(行閣)이 있고 치중문(致中門)과 봉양문(鳳陽門)이 있으며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이다.

 

덕홍전(德弘殿)

덕홍전은 1911년에 건립된 덕수궁 내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으로 내외 귀빈이 황제를 알현하던 곳이다. 함녕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장대석을 3단으로 돌려 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지붕마루에는 양성(양쪽으로 회반죽을 바름)하고 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였고 지붕은 측면에 합각부를 가지고 있다.

 

덕홍전과 함녕전의 행각.

 

덕홍전의 담장을 따라가면 정관헌이다.

 

 

담장 바깥.

 

정관헌 바깥쪽 문으로 아름답게 만들어져있다. 이리로들어가면 정관한이다.

너무어두워 F4에 노출을 무려 30초주었다.

 

정관헌(靜觀軒)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靜觀軒)은 1900년경에 건립되었다.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組積式)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이다. 덕홍전 뒤편과 정관헌 사이에는 작고 아담한 후원이 있다.

 

정면.

 

측면.

 

 

내부모습.

 

 

정관헌앞의 소나무숲도 운치있었다.

 

 

즉조당(卽祚堂)

즉조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덕수궁의 침전이다.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그곳에서 즉위한 뒤에 즉조당이라 불린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화재 후 중건되었다. 이후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가 순종 융희 원년(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거처하였다.

즉조당 앞에 놓여진 괴석들은 1984년에 창경궁에서 옮겨온 것이다.

 

건물은 준명당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구성을 보면,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이며, 오른쪽 두 칸은 방과 방에 부속된 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이다.

 

준명당

준명당은 1904년의 화재로 다시 지어졌다. 원래의 준명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97년에 새로 지은 내전(內殿)의 하나로 한때 고종이 거처하며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후에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준명당은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준명당에서 바라본 중화전  뒷모습.

 

석조전 별관.

석조전은 보수공사중이라 가려져있었다.

 

중화전으르 지나며 정문으로 향한다.

 

대한문이보인다. 덕수궁 야경답사를 마감한다.

 

5개고궁중 유일하게 덕수궁만 밤 9시까지 개장한다.

그래서 야경감상은 덕수궁밖에 할수가 없다. 야간에도 관리인들이 수시로 돌아다녀, 관리에 애쓰는 모습이다. 

5개궁궐이 야간에도 다 개방됐으면 좋겠다는게 나의 바램이지만, 그걸 어떻게 관리하는가에있어서는 나도 답이안나온다.

 

그리고 야간개장할바에야 조명에도 신경좀 썼으면 좋겠다.

덕홍전과 함녕전 그리고 즉조당과 준명당은 조명이 없어, 너무 밋밋하고 어두워 궁궐의 위용이 나타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