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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 - 향원정(香遠亭)과 건천궁(乾淸宮)

메탈 2009. 12. 2. 18:55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
향원정으로 향하다 보면 향원정 바로 앞에 함화당과 집경당을 볼 수 있다.
이곳 함화당과 집경당 앞은  흥복전(興福殿) 등 내전의 전각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3간의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 4년(1867)∼고종 10년(1873)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함화당과 집경당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북궐도형>에 의하면 함화당과 집경당을 잇는 복도 사이에는 샛담을 두어 계명문(啓明門)이란 일문(日門)은 남쪽 담의 문으로, 영춘문(迎春門)이란 월문(月門)은 북쪽 담의 문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변에 담장을 두어 여러 채의 부속 건물과 문을 두었음도 알 수 있다.
고종이 향원정 뒤편에 건청궁(乾淸宮)을 만들어 머물 당시에 이곳 함화당과 집경당에서 외국사신을 접견했다고도 한다.

 

막 복원이 끝난것 같이 새것이란 느낌이다. 작년엔 없었다. 

 

향원정이있는 뒤쪽으로 들어갔다.

 

궁녀들이 있는곳이라 제법 장식이 많았다.

 

함화당(咸和堂)

 

 

이곳으로 들어가면 집경당으로 가는 복도가나오고...함화당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복도각.

 

여기도 화기를 제압하는 의미로, 아궁이에 깨진 얼음을 묘사한다.

 

집경당 들어가는 문.

 

집경당이다.

 

 

 

이 문을 열고 나가보았다.

 

밖에서 본 모습인데, 궁녀들의 공간이라서 그런지 문이 모두 작았다.

 

 

뒤쪽으로 돌아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것이 비교적 큰문이라 할수있었다.

 

이번답시는 8,9.10번이 되겠다.

 

향원지와 향원정(香遠亭)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2층의 육모지붕을 얹은 정자이다.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취향교라 하였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한바퀴 돌아본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향원정 바로 뒤가 건청궁이다.

건청궁(乾淸宮)

경복궁이 중건되고 5년이 지나서 고종 10년(1873년)에 와서 지어진 건물이다.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 한적한 곳에 위치한다.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앞에는 향원지라는 큰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정자를 꾸몄다. 건물은 민간 사대부 집의 형태를 따르면서 화려하고 섬세한 치장을 가미하여 지었다.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서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를 연상시키는 구성을 하였다. 

 

담장에는 벽돌을 이용해서 아름다운 꽃무늬를 꾸몄다. 고종은 이곳을 좋아하여 왕비와 함께 자주 머물렀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지 않을 때에는 역대 임금의 초상화를 모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가롭게 휴식할 목적과는 달리 이 건물은 조선말기 정치적 혼란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고종은 이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공사들을 접견하면서 여러 정치적인 문제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 사이에 서재인 관문각은 러시아인에 의해서 2층 벽돌조 건물로 개조되기도 하였다. 궁 안에 최초로 전등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1895년 일본인들이 궁궐을 습격해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이 건물 곤녕합의 누마루인 옥호루였다. 이 사건 이후 건물은 한 동안 방치되었다가 철거되고 말았으며, 2006년에 와서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건청궁 입구.

 

 

문으로 들어가면 왼쪽엔 왕이있는 장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바로가면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이다.

 

곤녕함으로 가 본다.

 

 

 

민비가 시해당한 옥수루.

 

옆으로 돌아가본다.

 

옥수루 뒤쪽.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

 

 

 

이 문을 나서면 장안당 뒤쪽이 된다.

 

저 건물에서 최초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밝혔단다.

앞의 공터는 서양식 3층건물인 관문각이 있던자리다.

 

왕이 기거했던 장안당이다.

 

 

장안당 정면.

 

누마루의 현판.

 

 

 

장안당과 곤녕함의 복도.

 

이문은 곤녕함으로 가는 문이다.

 

처음 들어왔던 문과 방들.

 

장안당 앞을지나 반대쪽 문으로 향한다.

 

장안당 문.

 

밖의모습.

 

건청궁 답사를 마치고 옆에있는 집옥재(集玉齋)로 향한다.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八隅亭) 이 3채의 건물은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옮겨온 것이다. 고종은 이 건물들을 어진의 봉안 장소와 서재 겸 외국사신 접견장으로 사용(1893년 한 해에만 영국, 일본, 오스트리아 등 외국 공사들을 다섯 차례 접견)하였다.
이 3채의 건물은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신식이라고 생각되던 중국풍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집옥재의 현판을 송나라 명필인 미불(米連, 字 元章)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중국풍으로 만든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청나라풍이 느껴지는 집옥재.

 

 

무섭다기보다 귀엽다.

 

 

집옥재 내부.

 

오른쪽의 협길당.

 

 

 

 

사이의 문으로 들어가 본다.

 

집옥재와 협길당 사이의 복도. 유리문이다.

 

집우재 뒤쪽.

 

 

팔우당.

 

 

복도. 청나라 풍이 강하게 느껴진다.

 

 

계단을 내려선다. 

 

바로 옆에 문이 있는데 북문 신무문으로 가는문이다.

 

신무문. 뒤로 청와대가 보이고...

 

신무문뒤의 청와대. 원래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청와대서 바라본 신무문.

지난 여름에 찍어둔 사진이다.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다시 이 문을지나니 경복궁 안이다.

 

자고(字庫)
근정전에서 사정전으로 들어오는 사정문 좌우측 행각에는 천자문의 순서로 검은 팻말을 단 자고(字庫)를 볼 수 있다.

자고는 창고인데 그 개별 창고들을 천자문의 天, 地, 玄, 黃…순서에 따라 창고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곳이 활자를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다는 말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없다.

다만 왕실에서 쓰는 인삼의 진상과 각종 직물, 의복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제용감(濟用監)의 창고로 잠시 쓰인 적은 있었다고 한다.

 

 

이제 태원전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