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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1 - 내전(內殿)과외전(外殿)

메탈 2008. 7. 18. 17:50

종    목 : 사적  제122호 
명    칭 : 창덕궁(비원포함)(昌德宮(秘苑包含))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579,319㎡ 
지 정 일 : 1963.01.18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창덕궁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창덕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 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쓰게된 뒤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정문인 돈화문이다.

 

돈화문 (敦化門: 보물 383호)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敦化는 『中庸』의 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층 문루에 종과 북이 있어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우진각 지붕형태다.

 

정문을 들어서면 다리가 나온다.

금천교 (錦川橋)다. 금천교는 1411년(태종11년)에 축조된 돌다리이다.
조선의 궁궐에는 공통적으로 초입부에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다. 특히 창덕궁의 돌다리는 그 아래 비단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비단(錦)에 내 천(川)자를 사용하는 錦川橋이다. 다리 아래에는 남쪽의 해태상, 북쪽에 거북상을 배치하여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았다.
다리 중간에는 잡귀를쫓는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벽사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아름다운 난간석과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이 돋보인다.

 

다른궁과는 달리 정문에서 90도로 꺾어져있다.

 

돈화문 뒷모습.

 

진선문(進善門).

금천교를 건너면 중간문에 해당하는 진선문이다.

진선문에는 태종대와 영조대에 북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이 와서 치면 왕이 직접 해결해준다는 신문고 혹은 등문고가 있었다고 전한다. 한편 진선문 현판 글씨는 1999년 복원 당시 서예가 정도준씨가 썼다. 다른궁과 달리 정문에서 다리를지나 중간문이, 일직선이 아닌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진선문에서 곧장가면 숙정문이고, 좌측에 인정전과 인정문이있다.

 

인정문 (仁政門: 보물 813호)과 인정전 (仁政殿: 국보 225호 )

인정문에서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여기서 즉위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이다. 이러한 행사 때에는 인정전 앞의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했다.
조선의 궁궐 정전에는 공통적으로 정면에 임금의 용상(龍床)과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되면서 인정전에 전등이 설치되었다.

 

인정문을 들어서면 인정전이다. 

삼도와 품계석이다.

 

 

태종년간의 창건 때에는 '정전 3간'으로 기록되었는데 태종말년에 이르러 서쪽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5간으로 확장된 것으로 생각된다.
전각은 다포작의 중층구조로 팔작지붕을 올렸고 상층부 모퉁이 기둥을 아래층까지 내려놓은 구조법을 택하였다

 

 

인정전 안의 모습.

 

인정전에서 바라본 인정문.

 

행각이다.

 

 

넓직한 인정전 앞뜰이다.

 

인정문문밖의 행각. 

 

행각규모가 무척컸다.

 

금천교를 건너 들어왔던 진선문이다.

 

인정문을 나와, 숙정문으로 들어간다.

 

좌측에 선정전과 희정당이 보인다.

 

선정전으로 가본다. 왼쪽의 건물지붕이 인정전이다.

 

선정전 (宣政殿: 보물 814호)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이다.
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잡으며 한쪽에서는 사관(史官)이 앉아 국사에 대한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사관들의 기록을 사초(史草)라고도 하며 이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이 복도각끝이 선정전이다.

 

 

복도각에 가려 선정전현판글씨가 잘 안보인다.

 

그리고 희정당 (熙政堂: 보물 815호)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는데,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 되었다.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 응접실에는 서양식 가구가 놓여져 있다. 상방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만물초승경도>,<총석정절경도>가 걸려 있다. 남행각 정문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변형되었다.

 

 

남행각에서 희정당으로 들어갈수있다.

 

 

 

희정당 앞뜰

 

 

 

 

희정당 뒷모습이고, 희정당뒤에 대조전이다.

 

희정당과 대조전을 잇는 복도각.

 

대조전 (大造殿: 보물 816호)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옮겨다 지었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경훈각은 대조전의 부속 건물로 원래는 이층 건물이었으나 1917년 화재 이후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 단층으로 옮겨 지었다.
수라간은 음식을 만들던 곳으로 내부는 조선 말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대조전에서 바라본, 문뒤의 희정당이다.

  

대조전의 앞모습.

 

 

복도각과 건물을  지나...  

 

이 건물뒤로가면 뒷뜰이다.

 

아름다운 장식이된 문이 둘이다.

 

 

굴뚝.. 

 

 

다음은 성정각(誠正閣) -또는 내의원(內醫院)인데, 개방을 하지 않았다.

희정당 동남쪽에 담으로 둘러싸여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남향한 건물이 성정각이다.

내의원으로 소개되고 있는 이곳은 원래 왕이 경연(經筵)을 열거나 세자가 서연(書筵 : 학자들과 유교 경전을 공부)하던 곳이다. 실제로 성정각 옆에는 중희당(重熙堂)이라는 동궁이 있었다.이런 곳을 내의원이라 소개하고 있는 까닭은 순종이 창덕궁에 기거하던 일제 강점기에 인정전 서편에 있던 내의원을 폐쇄하고 이곳을 내의원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내의원에는 의녀도 있었는데 이들은 남자의관에게 진찰받기 어려운 궁중 여성들의 치료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성정각옆 중희당터.

 

삼삼와

건물 이름이 독특하게 삼삼와로 부르는 연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부용정 남쪽에 있던 개유와는 중국서적을 수장하였던 건물이며 그 의미가 모든 것이 있는 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삼삼와는 여섯 모둠집이라는 뜻이며 승화루의 의신각과 함께 귀한 서적을 보관했 을 것으로 추측한다. 육각정인 삼삼와는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기둥 하부로 2단의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초석과 고막이를 돌려 놓고 그 위의 아래층 벽에는 전돌로 귀갑문 장식을 하였다. 바깥쪽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르고 상중하의 삼단으로 구획된 살난간을 두르고 이 난간이 칠분서의 난간과 계단으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육각형의 기둥을 사용한 초익공 겹처마로 지붕의 정상부에는 나지막한 절병통을 설치하고 있다. 현재는 위층의 창호가 세살분합문으로 되어있으나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에는 亞자살 분합문이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이것도 후대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칠분서 

칠분서는 육각정인 삼삼와에서 북쪽으로 연결된 한 칸 폭의 6칸 건물로서, 초익공 구조에 분합문을 설치하고 난간을 두른 복도각인데 건물 이름의 의미는 잘 알 수 없으며, 현재는 없는 건물인 중희당과 삼삼와를 연결하는 건물이다. 

 

승화루

상량정 서쪽에 있는 승화루를 “창경궁 궁궐지”에서는 창덕궁 후원 이 주합루에 비견하여 소주합루라 하고, 아래층을 “의신각”이라 하였다. 연경당의 정문과 낙선재의 정문이 다 같이 장락문인 점과 주변의 누각을 주합루와 소주합루라 한 것에서 창덕궁의 주합루와 창경궁의 낙선재와 승화루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주합이란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합루의 아래층인 규장각은 서고로 사용되고 위층은 어진 어제 어필 보책들을 보관하기도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선왕의 작품과 동서고금의 책들을 수장하여 시공이 합치되는 건물이라는 이름이 이해가 되나 소주합루가 같은 용도로 쓰였는지는확실하지 않다. 다만 아래층의 이름이 의신각으로 제도의 궁궐이라는 뜻이므로 각종 의궤와 법규책을 보관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따름이다.

 

그리고 상랑정이다.

낙선재 화계 뒤쪽의 후원인 높직한 터 위에 자리한 육각정의 누각건물이다. “궁궐지” 나 “동궐도형”에서는 육우정, 곧 “평원루”라 기록 하고 있다.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안쪽으로 다시 한 단을 돌려 쌓고 그 위에 육각형의 돌기둥으로 하층을 세운 뒤 그 위에 계자 난간의 툇마루를 구성하였고 난간의 궁판에는 투각하여 치장하고 난간 하부로도 낙양을 두어 장식하였다. 위층의 벽에는 육각형의 기둥사이로 사분합문의 창살 구성이 독특하고 공포는 일출목의 다포형식이며, 겹처마의 육각지붕 정상에는 절병통을 설치하였다. 내부의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었으나 중도리 안쪽 육각형의 부분은 마름모꼴의 소란반자로 구성하고 봉황과 용과 박쥐문양으로 화려한 단청을 베풀었다. 궁궐에 있는 소규모의 정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치장된 건물이다. 개방을 안해 멀리서 볼수밖에 없었다.

 

낙선재에서 바라본 상랑정. 

 

낙선재(樂善齋)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년)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다.
이 곳은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아름다운 화계(꽃계단)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들이 돋보인다.

 

 

 

 

 

 

낙선재의 앞뜰이다.

 

낙선재 밖의모습.

 

아담한 정자도 보인다.

 

 

창덕궁 후원(비원)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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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임진왜란때 경복궁이 불탄후,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기전까지, 창경궁과함께 약 250여년을 실질적인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화려한 궁궐을 뒤로하고, 비원으로 알려진 창덕궁 후원으로 가본다.

일반관람은 목요일밖에 되지않고, 인원제한을 두기때문에 아침일찍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