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립미술관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의 개인전으로 《최재은: 약속(Where Beings Be)》을 개최한다. 최재은(1953년생)은 조각, 영상, 설치, 건축 등 다양한 매체와 영역을 아우르며 다층적인 시공간 속에서 생명과 자연의 관계를 독창적으로 조명해 온 작가이다.
최재은은 1975년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일본 전위예술의 발생지였던 소게츠 아트센터에서 전통을 벗어난 소게츠 이케바나1에 심취하게 된다. 그는 데시가하라 소후(勅使河原蒼風)와 데시가하라 히로시(勅使河原宏)2에게 사사하고 전위 이케바나가 실내 공간에서 대지로 확장되던 변혁의 시기를 온전히 경험하며 작품 세계에 깊이를 더한다. 이후 작가는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대표 작가 참여(1995),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1991),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본 전시 초청(2016) 등 국제 무대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그랜드 티 세리머니 인 파리(Grand Tea Ceremony in Paris)》(1993)에서는 샬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 안도 다다오(Ando Tadao) 등과 함께 파리 유네스코 본부 ‘평화의 정원’에서 다실 〈또 하나의 달(Another Moons)〉을 발표하며 주요 해외 프로젝트를 통해 견고한 입지를 다졌다.
국내에서는 서울 경동교회의 〈동시다발(Synchronous)〉(1990), 해인사 성철 스님 사리탑 〈선의 공간(Seon Space)〉(1995–1998), 삼성서울병원의 〈시간의 방향(Direction of Time)〉(1994) 등 다양한 공공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DMZ 프로젝트로 널리 알려진 〈대지의 꿈(Dreaming of Earth Project)〉(2015– )을 〈자연국가(Nature Rules)〉(2020– )로 확장한 장기 프로젝트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제목 《약속(Where Beings Be)》은 ‘공생지약(共生之約)’이라는 작가의 표현처럼, 언어적인 의미를 넘어 문명 훨씬 이전부터 시공을 관통해 온 자연의 상호 연대성을 되새기게 하는 개념으로 제시된다. ‘약(約)’과 ‘속(束)’의 기원이 묶여 있는 형상이듯, 유구한 시간 속에서 존재들(Beings)은 말 그대로 실타래처럼 얼기설기 엮여 다 같이 자리해 왔다.
본 전시는 ‘루시’, ‘경종(警鐘)’, ‘소우주’, ‘미명(微名)’, ‘자연국가: 경계를 넘어’라는 소주제로 구성되며, 더불어 작가의 주요 작품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아카이브가 함께 제시된다. 최초의 인류와 현재의 우리가 공유해 온 긴 시간의 축을 소환하며 자연과 생명의 파괴에 인간이 감내해야 할 책임을 드러내는 전시는 백화된 산호와 DMZ의 생명들, 그리고 소멸하는 들꽃을 통해 공생의 가능성을 환기시키며 작가가 제안하는 생태적 연대의 길로 이어진다. 급변하는 지구 환경 속에서 《최재은: 약속》은 우리가 어떠한 삶을 지향할지를 되묻는다 - 안내문
전시는 〈루시(Lucy)〉를 마주하며 인류의 기원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시〉는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약 320만 년 전의 화석으로, 당시 ‘최초의 인류’로 추정되었던 루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이다. 작가는 이 화석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골반 형태에 주목해 히말라야산 한백옥돌을 육각형 기반의 허니컴 모양으로 절단하여, 세포의 완전한 형태로 여겨지는 육각형 조각들을 결합해 네 개의 뼈대 형상을 이루는 역삼각형 구조를 지층처럼 쌓아 올렸다. 〈루시〉를 둘러싼 자작나무 구조의 거대한 거처는 그 시간을 함께해 온 존재가 인간만이 아님을 암시한다.
〈대답 없는 지평Ⅰ(Horizon of the Unanswered Ⅰ)〉은 검은 바다의 이미지 위로 지구 여러 지역의 해수면 온도가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리얼타임’ 영상 작업이다. 끊임없이 갱신되는 데이터와 칠흑빛 바다가 병치되어, 수치화된 현실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 그 심각성을 알리고 있음에도 어둠 속에서 외면받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어 제시되는 〈대답 없는 지평 Ⅱ(Horizon of the Unanswered Ⅱ)〉, 〈대답 없는 지평 Ⅲ(Horizon of the Unanswered Ⅲ)〉는 오키나와 해수의 이상고온으로 백화된 산호로 참혹한 생태계 파괴 순간을 가시화하며, 자연이 보내는 경고로 작동한다. 동시에 생명을 잃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순백의 아름다움은 침묵 속에도 빛나는 상실의 미학을 보여준다.
존 던의 『묵상록』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는 전 지구적 재앙을 초래한 인간 역시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며, 이제는 인간 중심의 독선에서 벗어나 바다와 대지가 울리는 종소리를 들어야 할 때임을 시사한다.
‘소우주’에서 작가의 시선은 대지의 안팎에 존재하는 미시 세계로 향한다.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World Underground Project)〉에 사용된 와시(washi)는 간피(樹皮), 고조(楮), 아사(麻)를 배합해 제작한 종이로, 1986년 경주 토함산 자락에서 시작해 일본, 미국, 유럽, 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의 토양에 묻어 두었다가 일정 시간이 흐른 뒤 지상으로 꺼내어 공기와 접촉하며 형성된 문양(드로잉)을 고착시키는 방식의 작업이다. 본 전시에서는 일본 북서쪽 가루이자와(?井?) 숲속에서 진행된 1991?1992년 작업을 소개한다. 흙은 오랜 시간 축적된 자연과 문화의 흔적을 겹겹의 지층 속에 품고 있었고, 종이는 그 심연의 시간들을 자신의 몸에 새겨 돌아왔다.
〈순환(Cycle)〉은 앞서의 작업을 현미경으로 촬영하여 육안으로는 관찰하기 어려운 미세한 변화의 결까지 드러낸다. 세포 단위의 유기체 간 생장의 흔적은 순환의 질서가 미시의 세계에도 존재함을 일깨운다.
전시장 중앙의 〈숨을 배우는 돌(Stone that Learned to Breathe)〉은 경북 문경의 암석 위에 오랜 시간 쌓여 온 생명의 겹을 드러낸다. 표면에 먼저 내려앉은 지의류는 미세한 균열을 만들며 돌의 결을 만들고, 그 위로 이끼가 부드럽게 스며들어 또 다른 층을 더한다. 서로 다른 생명들이 남긴 흔적들은 돌의 굴곡을 따라 얇게, 때로는 두텁게 겹치며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그렇게 축적된 시간은 표면에 은은한 지형처럼 남아 있다.
‘미명(微名)’은 작고 미미한 존재들까지도 세상을 이루는 고유한 생명으로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최재은은 일상에서 마주한 들꽃과 들풀을 수집하고 그 이름을 찾아 기록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When We First Met)〉는 이 과정에서 채집한 560여 점의 이름 모를 생명들을 압화하고 이름을 더한 작품으로, 식물들이 그 기원과 인간과 형성한 문화, 그리고 자신이 직면한 위기에 대해 스스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관객의 응답을 기다린다.
장영규 음악감독과 협업한 〈이름 부르기(To Call by Name)〉는 산업혁명 이후에 멸종된 대표적 종의 이름을 부르는 음향 설치 작업이다. 숨결이 깃든 목소리로 불려지는 다소 생경한 여러 이름은 차가운 표본을 살아있는 존재로 일깨우고, 우리는 주위에 사라져 가고 있는 세계의 규모와 속도를 실감하게 되는 동시에 이름을 되뇌며 그들에게 다가가게 된다.
최재은은 2000년 〈길 위에서(On the Way)〉 촬영 시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자리에서 어린 출연자가 시를 낭송하던 순간을 회상한다. 당시 콘크리트 경계선 사이로 남북을 오가던 개미와 그 위를 넘어 날갯짓 하던 나비는 인간이 만든 ‘닫힌 경계’와 자연이 지닌 ‘열린 경계’ 사이의 간극을 선명하게 보여주었고, 이는 이후 여러 작업에 있어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2014년에 시작된 〈대지의 꿈(Dreaming of Earth)〉 프로젝트는 철원 지역 DMZ 안에 남북을 공중으로 연결하는 보행로를 만들고, 보행로 중간중간에 공중정원과 정자, 타워를 설치하고, 철원 제4 터널 내부에 종자와 지식 저장소 등을 마련하는 계획으로 구체화된다. DMZ 지역을 ‘자연이 지배하는 국가’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 프로젝트는 건축, 생태, 기술, 예술, 인류학을 아우르는 국제 협업을 바탕으로 구축된 세계적 규모의 종합 생태예술 로드맵이다. 본 전시에서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18명이 제안한 내용을 6채널 아카이브 영상으로 소개한다.
〈자연국가(Nature Rules)〉는 그 연장선에서 DMZ를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하여 현재의 생태 현황을 분석하고, 파편화된 나지(裸地)에 상응하는 식재를 더함으로써 생태 숲을 회복하는 데 의의를 둔다. 최재은은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2010년부터 2022년에 걸쳐 DMZ에 자생하는 수종을 이상적인 환경에 적용하기 위한 장기간의 정보 수집과 다양한 방식의 탐색을 지속했으며, 그 결실이 바로 DMZ의 ‘생태 현황 분석도’이다.
본 전시에서는 〈자연국가〉의 구체적인 매뉴얼과 종자볼(Seed Bomb)에 사용되는 씨앗 40여 종이 전시된다. 관람객은 작가가 만든 웹사이트에 접속하여 지도를 보며 자신이 희망하는 구역에 종자볼 기부를 약정할 수 있다.
분단의 상징인 DMZ 철조망을 녹여 징검다리로 제작한 〈증오는 눈처럼 녹는다(Hatred Melts Like Snow)〉는 인간의 경계와 자연의 무경계 간의 대립에 대한 작가 의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가시 돋친 증오로 가득한 단절의 표상을 녹여 만든 발판을 즈려밟아 걸음으로써 우리는 경계를 넘어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의 이행을 염원한다.
한때는 전쟁터였고 지금도 그 역사 속에 머물러 있는 DMZ의 땅 위에서는 역설적으로 수많은 생명체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것은 우주의 본성이 생명과 미래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확연히 보여 주는 것처럼, 인간이 사라진 자리에 자연의 국가가 들어서 있는 것이다! 이 땅은 마치 자연의 주권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상징적 공간인 것이다. - 최재은
전시의 마지막 섹션은 최재은의 작업 세계가 형성되고 확장된 과정을 모형과 문헌자료를 통해 통합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재생조형관(Recycle Art Pavilion)〉, 〈루시(Lucy)〉, 해인사 〈성철스님 사리기(Reliquary of Venerable Seongcheol)〉, 〈시간의 방향(Direction of Time)〉, 〈즈레(Zure)〉 등 주요 프로젝트의 모형은 각 작업의 개념적, 구조적 실험을 가시화하는 조형적 기록이다. 문헌 아카이브는 작품집, 도록, 평론, 도면 및 스케치, 언론 기록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러한 작업의 전개 과정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근거를 제공한다.
작가의 작업적 기반은 1970?1980년대 일본 소게츠 아트센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그는 전통 이케바나가 경계를 넘어 조각, 건축, 대지예술로 확장되던 전위적 흐름 속에서 이사무 노구치, 플럭서스 및 대지예술 작가들의 활동을 직접 목도하며 작업 세계를 확장해 왔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이 시기를 “위대한 문명을 발견한 순간과도 같았다”라고 회상하게 한 배경이자 자연, 시간, 존재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
이는 초기작 〈흐름(Flows)〉(1983)과 〈대지(Earth)〉(1985)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두 작품은 순환, 흐름, 대지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공 사이의 긴장을 탐색하며, 작가가 기존 표현 체계에서 벗어나 고유한 언어를 형성하기 시작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작업은 점차 건축적·도시적 규모로 확장되며 생태·사회적 문제의식까지 아우르게 되었고, 경동교회 옥상 설치 〈동시다발(Synchronous)〉(1990),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미시-거시(Micro-Macro)〉(1995), 폐유리병 4만 개를 재구성한 〈재생조형관(Recycle Art Pavilion)〉(1993)이 이러한 경향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최재은의 약속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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