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궁(宮),당(堂),루(樓),정(亭)

함라 김안균가옥 (金晏均家屋)

메탈 2011. 8. 8. 15:34

종    목 : 시도민속문화재 제23호 (익산시) 
명    칭 : 김안균가옥(金晏均家屋)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면적 : 일곽 
지 정 일 : 1986.09.08 
소 재 지 :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57 
시    대 
소 유 자 : 김안균
관 리 자 : 김안균
상 세 문 의 : 전라북도 익산시 문화관광팀 063-859-5791

 
건물에 적힌 기록(상량문)으로 보아 사랑채는 1922년에, 동·서 행랑채는 193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조나 꾸밈 일부에 일본 건축 수법이 섞여 있다.
조선 후기 양반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집으로 당시 주택구조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문화재청


 

가옥의 건축연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대지가 2,318평, 건평만 188평이 되는 전라북도에서 규모가 가장 큰 만석꾼 가옥이다.

안채와 사랑채 및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량문(上樑文)의 기록으로 보아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에, 동·서 행랑채는 193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래 한옥양식과 현대양식을 접목시킨 보기드문 형태의 이 가옥은 행랑채에 딸린 대문 안쪽으로 안과 밖을 차단하는 벽을 두어 집안 생활을 철저히 보호하는 등 구조의 면밀함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집주인이 집을 개방하지 않는 탓에 늘 굳게 닫혀있고 출입을 허락받기가 용이하지 않다.

 

이 가옥은 외국의 경우처럼 거실과 침실을 분리하여 사랑채 깊숙한 곳에 침실을 별도로 두었고, 외부에서 벽돌담으로 사랑채와 안채를 차단하였으나 내부는 문을 달아 복도와 통하도록 하였다. 또 사랑채 전후에는 복도를 둘렀으며 바깥쪽으로는 유리 분합문을 달아서 채광에 유의하기도 하였다. 사랑채의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하부의 화강석은 윗부분이 좁고 아랫부분이 약간 벌어지도록 사각으로 깎은 석조에 통발기둥을 세웠다. 또 전후면에는 정교한 亞자 난간을 둘렀다.

안채의 경우도 사랑채와 같이 배치하였는데, 장대석, 디딤돌, 주춧돌 등은 희고 매끄러운 화강석을 마치 기계로 절단한 것처럼 고르고 정확하게 다듬고 잘라낸 것을 사용하였다.

 

사랑채 측면에는 변소를 별도로 세우고 여기에 세면소를 부설하였으며 행랑채 끝에는 목욕탕을 두었다. 그리고 뒷 곡간의 정면에는 입구 부분으로 지붕을 이어내고 기둥을 따로 세운 다음 바닥에는 시멘트를 발라서 통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반적으로 조선 말기의 양반가 형식 (兩班家形式)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대가이나 구조 및 의장(意匠) 등에 일본식의 수법이 가미되어 당시의 주택모양을 살필 수 있다. - 인터넷에서

 

담장과 함께한 긴 행랑채는 이 한옥의 규모를 가늠케해준다

 

행랑채와 문이 같이있다

 

안으로 들어가본다

 

안채와 구분하는 담장이있고...

 

행랑채앞에 안채로들어가는 문이 하나 더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행랑채. 저 앞의 문은 닫혀있어 용도를 알수 없었다

 

안채로 들어가니 담이 더있네.

 

안채다

 

내가 조사한바로는 일년전 전면적인 보수가 있었다는데, 그런데도 낡아보인다

 

방금 들어온 행랑채와 문

안과 밖을 두터이 분리하였다

 

안채정면

 

사랑채로 가는 문이다

 

이것을 보면 청나라영향을 받은것이 아닌가싶다

이유는 대원군의 별장 석파정에도 이것과 비슷한것이있는데, 청나라풍이라고 들었기때문이다

 

문을 지나니 사랑채다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문

 

한옥에 유리문을보아 개량식한옥이다

 

끝에는 정자풍의 방이다

 

 

 

행랑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벽

 

담장의 무늬가 옛 영화를 말해준다

 

마당의 수석

 

안채와 사랑채에는 복도가있어 안에서 다닐수있다

 

비록 제한적이지만 김안균 가옥을 볼수있었다

큰집답게 담장도 길었다

 

수많은 새월을 하나같이 지켜주는 담쟁이만이 그 역사를 알수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