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
명 칭 : 강릉선교장(江陵船橋莊)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면적 : 일곽
지 정 일 : 1967.04.20
소 재 지 : 강원 강릉시 운정동 43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이강륭
관 리 자 : 이강백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선교장(船橋莊)’이라는 이름도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 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문화재청
선교장은 강원도 지역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품위있는 사대부 가옥이다. 강릉시에 경포쪽으로 4km 쯤 떨어진 선교장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가옥을 대표하는 곳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타고 건넌다'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장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선교장은 조선 영조때(1703년)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 자리에 집을 지은 후,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있다. 총건평 1,051.24m²(318평)으로, 긴행랑에 둘러싸인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있고, 문 밖에는 수백평의 연못 위에 세워진 활래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구조를 보여 준다. 선교장은 건물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주거생활과 생활용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주변경관과 어우러진 풍치가 아름답다. 선교장의 사랑은 열화당이라하며, 여기에는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 권의 책, 글, 그림 등이 소장되어 있다. - 인터넷에서
입구의 장승
선교장 앞의 연못과 활래정
덕수궁 부용정과 부용각을 꼭 닮았다
활래정(活來亭)
활래정은 선교장 정원에 판 인공 연못 위에 세운 정자로 순조16년(1816)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세웠다. 정자명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 중 "爲有頭源活水來" 에서 땄다고 한다. 이 건물은 마루가 연못 안으로 들어가 돌기둥으로 받친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활래정은 벽면 전부가 분합문의 띠살문으로 되어 있으며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옆에 접객용 다실이 있다.
이 문을지나면 활래정이다
모습이 부용정과 많이 닮았다
선교장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문
문을 들어서면 다시 작은문이다
열화당으로 가는 문
안채와 동별당으로 가는 문
동별당으로 가본다
동별당
동별당(東別堂)
안채와 연결된 주인 전용의 별당건물로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동쪽에 2개, 서쪽에 1 개의 온돌방을 만들고 앞면에는 넓은 툇마루를, 뒷면과 동쪽은 좁은 툇마루를 돌렸다.
벽이 모두 문으로 되어있는게 특색이다
옆의 안채
안채
안채는 170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로 세종의 형인 효령 대군의 10대손인 이내번이 창건한 것으로 선교장 건물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안방과 건너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부엌이 안방에 붙어 있다.
안채에서 서별당으로 가는 작은문
서별당으로...
서별당으로..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 서재겸 서고로 사용하던 서별당이 있는데 소실되었다가 1996년에 다시 복원하였으며, 건물의 전면에는 행랑채가 있다.
행랑채
안채는 장식이 화려했다
행랑채
행랑채에 문이있는데 이것이 대문인것 같았다
밖의 모습
대문과 이어진 행랑채. 방이 무척 많았다
신분이낮은 손님이나 하인들이 살던 곳이다
안채로 가는문이 2개인데 남녀유별이있어 그렇단다
중사랑
선교장 손님이나 학자,풍류객이 묵던 장소
열화당(悅話堂)
열화당은 남주인 전용의 사랑채로서 내번의 손자 후가 순조15년(1815)에 건립하였으며 당호인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悅親戚之情話)에서 따왔다고 한다. 열화당은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워진 누각형식의 건물로 아주 운치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앞의 테라스는 조선말기 러시아식건물로 러시아에서 선물로 지어준 것이다
열화당 아궁이
열화당뒤로 정원 노야원과 초정
이렇게 선교장을 둘러보았다. 이문을 나가니 민속공방과 곳간이다
원래 창고였으나 개화기때 신학문을 가르치던 동진학교(東進學校)로 사용하였다
선교장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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