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궁(宮),당(堂),루(樓),정(亭)

인천도호부청사 (仁川都護府廳舍)

메탈 2008. 6. 27. 17:30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1호 (남구) 
명    칭 : 인천도호부청사(仁川都護府廳舍)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82.03.02 
소 재 지 : 인천 남구  관교동 146-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인천광역시교육청
관 리 자 : 인천광역시교육청
상 세 문 의 : 인천광역시 남구 문화공보실 032-880-4298

 

인천도호부 관청은 원래 15∼16동의 건물로 구성되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출장 나온 관리들이 임시로 머무는 숙소인 객사의 일부와 19세기 초 건물로 수령들이 공적인 일을 하던 동헌 및 훨씬 후대에 세운 창고만이 남아있다.

객사는 지붕기와에서 발견된 글에 따르면 조선 숙종 3년(1677)에 고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 현재의 문학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동헌과 함께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기 때문에 지을 당시 건물들의 배치·형태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객사는 원래 20칸의 규모였다고 하나 현재는 중앙부 앞면 3칸·옆면 2칸의 건물 일부만 남아있다. 

 

아문(衙門)이다.

관아의 정문으로 팔작지붕형태를 취하고있다.

문이 세칸으로 나뉘어져있어,외삼문이라고도하는데, 가운데문은 수령만이 출입하고 좌우문은 일반인이 출입하였고, 문지기가있어 사람들을 통제하였다.

 

 

 

 

아문 뒷모습. 

 

육중한 아문모습이다.

 

아문뒤로 바로 중문(中門)이다.

중문은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6방관속들의 집무처이기도 하다.

아문인 외삼문과 구별하여, 내삼문이라고도 하며, 가운데가 솟아있어 솟을대문이라고도 한다.

 

문옆에 6방의 집무처이다.

 

 

동헌(東軒)이다.

부사(府使)의 집무실로 객사(客舍)의 동쪽에있다하여 동헌으로 불린다.

 

都護府聽舍(도호부청사)란?

도호부는 조선시대 행정기관의 하나로 상급기관인 목(牧)과 하급기관인 郡ㆍ縣 사이에서 행정을 담당했던 관청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道로 나누고 道아래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을 두고 지방행정업무를 관장하였다.

인천에 도호부가 설치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초기 학자이자 名臣인 강희맹(姜希孟)이 세종2년(1424)에 쓴 "仁川府陞號記(인천부호승호기)"에 이미 객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최소한 그 이전에 도호부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제의 건물을 조선초기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객사지붕의 기와에서 "강희16년(숙종 3년 : 1677)"이라는 명문이 나온 것을 볼 때 중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천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조선 세조6년(1460)으로 세조의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세종비)의 진외가이기 때문이었다.


인천도호부에는 당초 왕권의 상징인 객사(客舍)를 비롯하여 부사의 집무처인 동헌(東軒), 내동헌(內東軒), 삼문, 사령청, 향청, 군관청, 훈무당, 옥사, 어용고, 군기청, 등 원래 15∼16동의 건물로 구성되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객사(客舍)의 일부와 19세기 초 건물인 동헌(東軒) 및 훨씬 후대에 세워진 창고만이 남아 있다. 현재는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객사와 동헌 일부만 보존되어 있다. 이 곳에 복원한 건물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花島鎭圖"를 근거로 객사, 동헌, 공수 등 7동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객사는 윈래 20칸의 규모였다고 전하여지나 현재는 양쪽 익랑채가 없어지고 박공지붕으로 된 중앙부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 일부만 남아 있다. 동헌은 합각지붕의 굴도리집으로서 관청 건물로는 드물게 부연을 달지 않은 홑처마지붕을 하고 있으며 둥근기둥이 아닌 네모기둥을 사용하고 있다.

客舍는 임금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서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東軒)보다도 격이 높았으며 그런 만큼 관아 시설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하며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전패(殿牌)를 모시고 있는 가운데 채가 전청(殿廳)이며, 부사(府使)가 정기적으로 예(禮)를 올리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집하는 곳이었다. 좌우의 익사(翼舍)는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접대와 숙소로 이용되었다.

東軒은 부사(府使)의 집무실로서 객사(客舍)의 동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물의 격식은 객사보다 한 단계 떨어졌으나 그 지역 최고 실력자의 지위에 합당하게끔 위엄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忠義碑(충의비)는 조선왕조개국(1329년)으로부터 한일합방(1910년)까지 인천도호부사를 지낸 355인의 성명을 새긴 것이다. 유교정치이념에서 忠과 義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을 임금은 신하와의 바른 도리인 의를 실천함으로써 이를 통해 민본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다.

衙門(아문)은 관아의 정문으로 2층으로 된 누대(樓臺)에 위풍당당한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문에 이르면 수령이하 모든 사람이 말에서 내려 걸어서 출입하는 것이 통례였으며, 좌에 건장한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막았다. 또한 대문의 공간 일부를 이용하여 민원인 들의 임시 대기실로 쓰기도 하였다.

도호부의 업무는?

도호부사는 도호부의 모든 행정을 통괄하는 자로서 그 주된 임무는 수령칠사(守令七事)라 하여 :

① 농사와 누에치는 일을 잘 돌볼 것
② 인구를 늘릴것
③ 교육을 진흥시킬 것
④ 군대에 관한 사무를 바르게 할 것
⑤ 부역등을 균등히 할 것
⑥ 민사의 소송을 바르게 할 것
⑦ 간교하고 교활함이 없도록 할 것

등 지방수령의 공통임무에 속해 있으며 지방관의 치적은 관찰사를 통해 매년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또한 유사시에는 군대를 지휘하여 전투에 임하는 등 군사지휘권도 장악하고 있었다.

 

사주문(四柱門)

동헌의 부속건물로, 가족이머무는 내아와 통하는 문이다.

 

동헌에서 집무광경. 

 

옆방.

 

동헌에서 바라본 아문과 내삼문.

 

 

동헌옆이 객사(客舍)다.

객사는 임금의 위패를 모신곳으로,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보다 격이 높았다.

보이는 문은 내협문이고, 그뒤로 객사로 들어가는 삼문(三門)이다.

 

객사앞에서 바라본 동헌.

 

객사로 들어가는 삼문(三門)앞이다.
 

 

삼문을 들어가면 앞에 임금위패를 모신 객사가 보이고, 왼쪽에 공수(公須)건물이다.

 

 

공수(公須)

객사의 부속건물로 부엌,곳간,온돌방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객사를 관리하는 사람들과, 공무를 수행하러 내려온사람들이 묵는장소다.

 

 

 

객사. 

 

임금의 위패앞에서 절을 올린다.

 

객사에서 보이는 삼문.

 

객사 좌우의 구조,

 

 

바닥이 벽돌로 되어있다.

 

객사에서 보이는 위풍있는 아문모습이다.

 

내협문과 사주문.

 

인천도호부 청사는 비록 일부분이 남아있지만, 지방관리청의 모습을 알기쉽게 볼수있다.

전국의 동헌이 이미 그 모습을 잃은지가 오래되었으나, 인천도호부청사는 그나마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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