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彰義門
서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사대문, 그 사이에 사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을 북소문이라고 부른 일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려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태종 13년(14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 4년(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 9년(1617)에는 궁궐 보수 작업 때 석재를 운반하기 위하여 열어 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창의문이 서울 성곽의 문루로서 제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영조 17년(1741) 이곳을 수축할 때였다. 당시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창의문은 인조반정(1623년)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이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비로소 세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956년 창의문 보수 공사 때 천장 부재에서 묵서로 된 기록으로 확인되었고, 지금 창의문에는 인조반정 때 공신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현판이 걸려 있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이지만 서울의 사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백 년 동안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고, 문루에서 바깥쪽으로 나와 있는 수구水口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에 매력을 더하고 있다. 또한 성문의 월단月團, 무지개 모양의 석문 맨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새긴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새겨 넣은 것이라고 한다. - 문화재청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창의문에관해 전시중이다.
2008년 숭례문이 불타버린후 유일하게 옛모습그대로 남은 유일한 도성문이라한다.
로비에 설치된 창의문 옛사진들
전시실로 들어가본다.
인조반정과 인연이 깊은 창의문 설명.
당시의 도성방어
창의문(한양성곽문) 축조과정을 자세히 담아보았다.
엣 한양도성 모형
창의문과 1.21사태.
이로인하여 1968년부터 1992년까지 일반인 출입이 통제됐다.
한양지도와 서울지도
이렇제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입구에 설치된 창의문 360도영상이다.